이재명 대통령이 2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정상외교 슈퍼위크'의 본 무대가 막을 올린다. 한미, 한중, 한일 정상회담이 잇따라 예정된 이번 주부터 국내외 언론이 ‘정상외교 슈퍼위크’라 부를 만큼 전례 없는 외교 일정이 몰려 있다.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그 중심 무대다.

27일 저녁부터 경주는 세계 각국의 대표단이 속속 도착하면서 국제도시로 탈바꿈했다. 예술의전당 인근에 세워진 대형 조형물은 개최지의 상징처럼 서 있고, 경주 시내 곳곳엔 각국의 국기가 펄럭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번 주는 대한민국 외교가 시험받는 주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관전 포인트는 29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이다. 이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마주 앉는 것은 불과 두 달 만이다.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상호 방문이 이뤄진 적은 드물다. 그러나 짧은 시간만큼이나 난제도 여전하다.

양국이 맞붙은 관세 협상은 여전히 타결점을 찾지 못했다. 한국의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수출에 대한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가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 대통령은 최근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투자 방식과 금액, 손실 분담 등 대부분의 항목이 아직 조율 중”이라고 인정했다. 한미 간 안보 협력 문서는 사실상 마무리 단계지만, 미국이 관세 문제를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 경우 정상회담은 ‘성과 없는 회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매우 가까운 합의”가 실제로 전격 서명으로 이어진다면, 이재명 대통령은 실용외교의 첫 결실을 챙기게 된다. 문제는 그 합의가 얼마나 상업적으로 합리적이냐에 있다. 국민에게 납득될 수준의 조건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가 정치적 부담으로 남는다.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 일정은 한미 회담에서 멈추지 않는다. 11월 1일로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은 11년 만에 방한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만남이다. 최근 수년간 냉각됐던 한중 관계가 이번 회담을 계기로 반전될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다. 시 주석은 차기 APEC 의장국으로서, 한국의 실용외교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한미 밀착’을 경계하며, 한반도 문제와 경제협력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 대통령은 “과거의 안미경중(安美經中)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발언은 중국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한국이 자율 외교 노선을 택했다는 선언으로도 읽힌다.

또한 30일께로 예상되는 한일 정상회담도 변수다. 새로 취임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의 첫 회담은 ‘셔틀외교’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 대통령은 이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도쿄에 파견해 실무 조율을 진행하는 등 관계 복원에 공을 들였다. 우익 성향의 다카이치 총리와의 대화가 매끄럽게 진행된다면, ‘한미일 공조 축’은 다시금 견고해질 수 있다.

2025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개최를 앞둔 27일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 인근에 행사 개최를 알리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이번 슈퍼위크의 또 다른 변수가 있다면 북미 대화 가능성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북한은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았지만, 불과 하루 반 만에 성사됐던 2019년 판문점 회동의 전례를 감안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시나리오도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외교안보라인에 ‘즉시 대응 체계’를 유지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현주 국가안보실 3차장은 “30시간 안에도 준비할 역량이 있다”며 ‘판문점 재연 가능성’을 언급했다. 북미 대화가 재가동된다면, 이 대통령의 ‘END 구상(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에도 새로운 동력이 붙게 된다. 한국이 다시 한반도 평화의 ‘페이스메이커’로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번 외교전의 마지막 변수는 30일 열릴 것으로 보이는 미중 정상회담이다. 양국은 최근 희토류 수출 규제와 100% 관세 부과 등으로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으나, 최근 들어 강경조치를 일시 중단하며 ‘탐색전’에 들어갔다. 만약 이번 회담에서 화해의 실마리가 잡힌다면, 한국 외교는 중재자 역할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일 수 있다. APEC 의장국으로서 이 대통령은 ‘경주 선언’이라는 합의문을 조율하고 있다. 이는 APEC 정신의 핵심인 다자협력과 포용경제를 되살리는 상징이 될 전망이다. 혼돈의 국제질서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내놓는다면, 한국은 외교적 리더십을 입증하게 된다.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국제행사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에게는 외교, 안보, 경제가 한꺼번에 교차하는 총력전의 무대다. 한미 간 관세 협상, 한중 간 신뢰 회복, 한일 간 관계 재정립, 그리고 미중 패권의 균형까지 모든 외교의 축이 한 주간 한국을 중심으로 회전하게 된다. 이 대통령은 출국 전 참모들에게 “국익은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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