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호반 광장에서의 APEC 보문단지 야간경관개선 '빛의 향연' 시연회. 시연회에서 거대한 알 모양의 APEC 상징 조형물에 미디어 아트가 진행됐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2025년 10월 중순, 가을 햇살이 경주의 능선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아침 안개가 걷히자, 고속도로 나들목의 한옥형 요금소가 눈에 들어온다. 새로 도색된 기와지붕 아래 선명한 한글 현판 ‘경주’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두 주 뒤면 이곳은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리는 무대가 된다.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신라 천년고도의 도시가, 이제는 21세기 경제협력의 심장부가 되기 위한 마지막 손질에 들어갔다.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은 이미 새로운 모습이다. 한국도로공사가 지난달 말 개통한 다차로 하이패스 덕분에 차량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도시로 흘러든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보문단지로 향하는 길, 가을 하늘 아래 펄럭이는 현수막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첨성대와 다보탑, 천마총을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도로 양옆에 세워져 있다. ‘신라의 빛으로 세계를 맞이합니다’라는 문구가 황금빛 태양 아래 반짝인다.

“오늘도 점검 중이에요. 회의 전까지는 하루도 쉴 수 없어요.”
보문단지 입구에서 표지판을 정비하던 한 작업자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의 뒤로는 ‘작업 중’이라는 붉은 표지판이 서 있고, 도로변에서는 조형물의 조명 밝기를 조정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APEC 개막을 앞두고 경주는 말 그대로 ‘24시간 도시’가 되어 있었다.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내에서 작업자들이 도로 인근 조형물에 대한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다.


정상회의가 열릴 화백컨벤션센터(HICO) 앞은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소방서 차량, 군 트럭, 한전 기술팀 차량이 잇따라 드나든다. 안전모를 쓴 현장 관계자들이 철제구조물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안전 최우선!”을 외친다. 센터 외벽의 초대형 LED 전광판에서는 APEC 공식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One Asia, Shared Future’— 한글과 영어 문구가 번갈아 나타나며, 새로 칠한 흰색 외벽에 푸른빛이 물든다.

내부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지만, 유리벽 너머로 비친 로비는 이미 완전히 정비된 상태였다. 회의장 조명은 모두 켜져 있었고, 내부 리허설을 위해 스피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경주시는 이곳에서 21개 회원국 정상들을 맞이하게 된다. 천년의 도시가, 글로벌 외교의 무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셈이다.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내 화백 컨벤션센터 모습.


보문호를 따라 걸으면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비된 인도, 단장된 가로등, 그리고 새 표지판들. 그 길을 따라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40대 관광객 이모 씨는 “경주에 몇 번 왔었지만, 이번엔 도시 전체가 새로워진 느낌이에요. 도로도 깔끔하고, 식당마다 외국인 안내 표지도 잘 돼 있더라고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처럼, 경주는 지금 ‘APEC의 도시’로 변신 중이다. 엑스포공원 인근에는 산업기술의 미래를 전시할 경제전시장이 완성됐다. 산업역사관, 첨단미래산업관, 경북 강소기업관, 그리고 한글·한복·한옥·한식·한지로 구성된 ‘5한(韓) 하우스’. 철제 펜스를 걷어내고 마무리 페인트칠을 하던 한 기업 관계자는 “공사는 끝났고, 전시 콘텐츠 조율만 남았다”며 “한국의 기술과 문화를 함께 보여주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내 월드 음식점.

보문단지 내 유명 한우 전문점에 들어서면, 테이블마다 붙은 작은 QR코드가 눈길을 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자 영어, 일본어, 중국어, 베트남어로 된 메뉴판이 뜬다. ‘통역 서비스 1330’이라는 문구도 함께 표시된다. 이 식당은 경북도가 지정한 ‘월드 음식점’ 중 하나다. APEC 참가 외국인들을 위해 경북도는 150개 업소를 선정해 외국어 메뉴판, 다국어 스마트 메뉴, 통번역기 등을 비치하도록 했다. 식당 매니저는 “외국 손님들이 QR코드를 정말 많이 이용해요. 주문받기가 훨씬 편해졌죠. 요 며칠은 APEC 관계자들이 하루에 한두 팀씩 찾아오고 있어요”라며 행사 분위기를 실감했다.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내에서 운행하는 자율주행 셔틀버스 모습.

보문호수를 따라 걷다 보면 흰색 미니버스가 조용히 다가온다. 운전석엔 아무도 없다. 경주시가 지난달부터 운행 중인 자율주행 셔틀버스다. 19인승 1대와 8인승 2대, 총 세 대의 셔틀이 동궁원, 화백컨벤션센터, 경주월드, 엑스포공원을 순환한다. 차체 옆면에는 ‘Smart Gyeongju APEC Shuttle’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시 관계자는 “외국인 방문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자율주행 시범사업이기도 하다”며 “한국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회의를 불과 2주 앞둔 지금, 경주는 준비의 막바지에 있다. 각 시설은 대부분 공사를 마쳤고, 남은 것은 ‘완성도’다. 숙박시설의 통번역 서비스, 교통편의, 자율주행 버스의 안전 점검 등 세세한 부분까지 리허설이 이어진다. 경북도 APEC 준비지원단 김상철 단장은 “지금은 체크리스트 하나하나를 점검하면서 운영의 완성도를 높이는 단계”라며 “경주가 아시아의 중심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주의 밤이 찾아오면 화백컨벤션센터 외벽의 전광판이 다시 빛난다. ‘Welcome to Gyeongju — APEC 2025’. 천년 전, 신라의 불빛이 황룡사를 비췄다면, 오늘의 빛은 세계를 향하고 있다. 고대의 문화유산과 첨단 기술이 공존하는 도시, 그 경주가 이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APEC 정상회의는 단지 국제 행사가 아니라, 신라의 후예들이 다시 세계와 만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이미 완벽히 준비된 듯, 가을의 경주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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