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2024년 5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온우주의 천지는 녹음으로 변하여 초여름이 아니라 이미 한여름에 햇볕이 쨍쨍하게 내려 쪼이는 더위 속에서 출산 예정일을 10여일을 앞둔 그녀는 가뿐 숨을 몰아 쉬었다. 커다란 일산으로 햇볕을 가린 호화로운 수레였고 또 옆에서는 시녀가 천천히 부채를 부쳐 주었지만 그녀는 온몸에 땀이 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흔히 카피라성(城)이라고 말하는 카피라바스투의 왕 ‘슛도다나’의 왕비 ‘마야’ 부인이다. 그 부인을 모시고 가는 일행들은 그녀의 친정 고장인 데바닷하(일명 한문 경전에서는 천비성(天臂城)이라고 말하고 있는 곳이다)로 가고 있다.
아이는 친정에 가서 낳는 것이 당시의 인도 풍속이었다. 만삭의 『마야』부인이 여행을 떠난 것도 그 풍속 때문이다.
카피라바스투에서 데바닷하까지는 아침 일찍 떠나도 저녁 늦게야 도착하는 거리이며 꼬박 하룻길이 실하다. ‘마야’ 부인 일행은 길을 너무 서둘러 산모가 지치지 않도록 새벽녘에 카피라바스투를 떠났다.
일행은 물론 천천히 갔지만 그런다고 어디 만삭의 몸이 소풍 나들이처럼 가벼울 수 가 있는가.
그러나, 몸은 무거워도 그녀의 마음은 가벼웠다. 아니 가볍다기보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 희망은 뱃 속의 아이를 잉태할 때 꿈 꾸었던 태몽을 자꾸만 되살려 내게 했다. 참으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하얀 코끼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 몸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의 몸이 둥둥 공중으로 떠올라 높이 높이 위로 솟아서 히말라야인 듯한 성스러운 산의 정상에 이르렀는데, 그 정상 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선한 선녀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정례(頂禮)를 올렸다.
머리가 상대방의 발에 닿도록 하는 절이 정례(頂禮)이다. ‘마야’ 부인은 열 달 전 어느 날 밤에 이 꿈을 꾸었다.
새벽에 상쾌한 기분으로 잠을 깬 그녀는 남편에게 꿈을 꾼 이야기를 했다.
“틀림없이 길몽이요, 그것도 굉장한 왕자를 얻는다는 태몽일 것이오.”
남편인 『슛도다나왕』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를 가볍게 포옹했다.
그날 왕의 첫 정무(政務)는 점바치를 불러서 해몽을 부탁하는 일이었다.
해몽의 결과는 아니나 다를까 “왕비가 왕자를 잉태한다는 것이었다.”
왕과 왕비는 결혼을 한 지가 20년이 넘는다. 그런데도 그 동안 왕비에게는 전혀 태기가 없어서 두 사람은 물론 신하들까지 입 밖에 말을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왕에게는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도 있었지만, 그녀들 역시 소생을 두지 못했다. 그러니 책임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자기 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왕은 거의 단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비가 태몽을 꾸었다니 이 얼마나 기뿐 소식인가.
실제로 왕비는 수태(受胎)를 해서 열 달이 지난 오늘 출산을 하려고 친정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열 달 동안 그녀 『마야』부인은 인도의 신성한 동물 흰 코끼리가 자기 몸 속으로 들어오던 태몽을 자주 기억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늘도 태몽을 다시 되살려 보면서 더운 날씨와 피곤함과 숨 가쁨을 희망으로 채색하고 있는 것이다. 늦은 점심때 쯤 해서 왕비 일행은 룸비니동산에 당도했다.
카피라바스투에서 25킬로쯤 되는 거리에 이름은 왕비의 친정어머니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친정 나라 데바닷하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데바닷하 성까지는 20킬로 남짓 떨어져 있다.
일행은 그 룸비니동산에서 행보를 멈추었다. 가는 길의 중간 지점이라 처음부터 거기서 휴식을 취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산의 한 쪽에는 규모가 제법 큰 연못이 있었다. 수레에서 내린 ‘마야’ 부인은 그 연못에서 목욕을 했다. 말이 목욕이지 사실은 내의를 입은 채 물 속에 들어가 땀을 씻는 정도이다. 그리고 더운 나라 인도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깨끗한 물만 보면 흔히 그렇게 목욕을 했다.
연못에서 땀을 씻은 그녀는 한동안 무우수(無憂樹)의 꽃이 만발한 동산의 나무 그늘 밑을 거닐었다. 산책하는 도중에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주저 앉았다.
“아 아, 아 야...” 뜻밖에도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출산 예정일은 아직도 10여일이 남아 있었다. 고대하던 왕비의 출산이라 일부러 그렇게 여유를 두고 출발 날짜를 잡은 것인데 이 진통을 어찌된 일인가. 새벽에 카피라바스투를 떠나서 쉬지 않고 더위 속에 여기까지 온 그 여행이 역시 힘겨웠던 모양이다.
수행하던 시녀들이 일행의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서둘러 장막을 치고 산실을 준비했다. 왕비는 나이가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선 만산이었고 또 조산이어서 출산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점바치가 예언한 그대로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가 바로 뒷날의 부처 『석가모니』이다.
시녀에게서 자기가 옥동자를 낳았다는 말을 듣고 탈진상태에서도 『마야』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가 10여일 조산을 했다는 사실이 약간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조산한 아이는 건강이 부실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런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경전에는 아이의 출산 과정이 좀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마야’ 부인은 룸비니 동산의 숲 속을 산책하면서 ‘마야’ 부인이 무우수(無憂樹)의 꽃가지 하나를 꺽으려고 팔을 위로 올렸다. 그 때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남자 아이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태어난 아이는 곧 동쪽으로 일곱 걸음 걸어나간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다음 오른 손으로는 하늘,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말한다. 하늘 아래서는 물론 하늘 위에서도 내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의 기술은 석가모니의 탄생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신앙적 해석이 만들어 낸 전설이지 사실일 수는 없다.
탄생의 그날이 언제였느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지만 한국, 중국, 일본 등이 그에 속하는 북방 불교에서는 음력 사월 초파일을 그날로 잡고 있다. 또 연대도 확실치 않다. 지금으로부터 대충 2천5백6십여년 전의 일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가장 널리 수용되고 있는 추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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