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리사 칼럼] ‘들어주기’

편집부 승인 2024.04.05 12:48 | 최종 수정 2024.04.05 12:52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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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 2024년 4월호=박기하 변리사] 고객의 발명이나 고안, 디자인, 상표 등의 지식재산권이 적절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다 보니 직접 고객을 만나 상담해야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대면 회의나 상담도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직접 자신이 개발한 제품을 보여주기를 원하거나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비밀이 유지될지에 대해 노심초사하여 직접 만나 상담을 받고 싶어하는 고객들이 많다. 변리사라는 자격시험에 합격한 지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업무를 하다 보니 이제는 처음 몇 마디만 나누어도 고객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이렇게 지레짐작하는 생각이 모두 맞지는 않는다. 내가 기대하는 대로 대화가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고, 다음에 미팅을 더 하거나 메일이나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처음 만나서 나누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업무가 전개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다른 전문직역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변리사는 모든 기술 분야에 대해 숙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다양한 고객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특허, 상표에 대한 법률지식이나 경험이 좀더 많다고 고객보다 우월한 위치라고 생각하며 대화하기보다 상대방이 해당 기술이나 브랜드에 대해 훨씬 더 고민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대리인이나 유능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사건을 잘 수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해 보는 것,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잘 기울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비단 대리인이나 전문직역 등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떠한 위치에서 어떠한 사람을 만나든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다 보면 좋은 만남, 좋은 대화, 그리고 내가 바라던 비즈니스가 되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특허청 절차를 대신하는 대관 업무를 하는 경우나 다른 당사자와의 분쟁 절차를 대리하는 경우에도 어려움이 생길 때 고객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충분히 고민해 보았을 때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번에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던 3월 초 어느 날 학교 교문 앞에 서 있던 한 국회의원 후보가 생각난다. 그는 유권자인 학부모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 있었겠지만, 학부모들은 분명 그 자리에서 그와 인사를 나눌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입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 후보를 떠올려보니 TV 뉴스 시간에는 자주 볼 수 있지만, 우리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서 그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정말 우리 지역구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분인지, 지역 유권자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민심을 헤아리며 일해왔던 분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렵다.

사전투표나 투표결과 예측과 같은 선거 시스템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발전했지만, 내가 초등학생 때나 한 세대를 지난 지금이나 후보자들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있더라도 그들의 활동을 일일이 찾아보며 평가하는 유권자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유권자들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후보들의 모습과 공약들은 선거 때 뿐인 것 같다. 어쩌면 그 후보도 유권자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 아침 일찍 학교를 찾은 것이 아니라 선거기간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당선된다면 나중에 불편하더라도 사건만 수임하면 된다는 발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도 부모로서 걱정되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소한 것이라도 남들과 비교하여 부족하지 않게 뒷바라지 해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님이 지금껏 나에게 해주시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며칠 전 초등학교 교육과정 설명회에서 해주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부모님들께 한 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학교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지,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잘 노는지, 점심은 제대로 잘 먹을지 많이 걱정되시겠지만 그런 걱정은 조금 나중에 하셔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조금 지켜봐 주시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할 수 있도록 먼저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학창생활을 경험한 선배로서 아이들이 바르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늘 부모로서 아이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겠지만, 담임선생님의 그 말씀에 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말하기 전에 아이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존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토라지고 언제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바뀔 수 있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때로는 훈육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아이들 입장과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아이들과의 대화도 가능하다.

이제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선거가 점점 유권자들의 관심사가 되면서 정부와 여당은 연일 선심성 정책을 내놓기 바쁘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들이 과연 국민들과의 소통에 의해 빚어진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그동안 듣지 않았어도 선거기간 동안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도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후보자들만의 선거가 되지 않을지 우려된다. 정권이 바뀐 후 약 2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 어느 때보다 불통과 독선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때로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국정운영도 필요하겠지만, 특히 요즘은 한 때 국민들이 정부와 여당을 지지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일부러 귀를 닫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언젠가부터 경청이라는 단어가 큰 화두였었고, 누구나 그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겠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나 보다.특히 국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들은 어떤 정책들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중하게 마련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나 전문가들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되어야 한다.

현재의 정부와 집권 여당은 급조된 정책과 야당 심판론을 내세우기 전에 자신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는지 먼저 뒤돌아봐야 할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이다. 후보자인 자신이 국민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국민들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들을 위해, 국민들의 뜻을 대변하기 위한 자리에 출마하기로 한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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