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늘 뒤늦게 도착한다. 당대에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던 지도자가 후대에는 민주주의의 피고석에 서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고립됐던 인물이 시간이 지나 ‘개혁의 아이콘’으로 소환되기도 한다. E.H. 카가 말한 것처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이 대화의 심장부에는 결국 권력을 쥐었던 이들의 공과(功過)가 있다. 전직 대통령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평가할 것인가는 곧 한국 현대사를 어떤 시선으로 다시 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시사의창》이 준비한 ‘전직 대통령 재평가 리포트’ 시리즈는 각 대통령을 향한 찬양과 혐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기보다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다시 소환해 공과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영웅 서사’와 ‘악마화’ 둘 다를 경계하며 기록과 증언을 통해 시대를 다시 묻는 길이 될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


[시사의창 2026년 1월호=김성민 기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생애를 돌아보며, 해방 전 독립운동과 건국 과정에서의 공로부터 집권 이후 권위주의 통치와 부정선거에 이르는 빛과 그림자를 객관적으로 조명한다. 12년 장기 집권 끝에 4·19혁명으로 쫓겨난 그의 역사를 재평가하여, 오늘날 한국 정치와 시민사회에 주는 교훈을 탐구해 보자.

이승만, 대통령 이전의 삶과 정치 역정
이승만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국권이 위태롭던 시기에 청년 시절부터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수학한 그는 독립협회 등에 참여하며 일찍이 ‘자주독립’의 이상을 품었다. 1898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어 한성 감옥에서 6년을 복역하며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는 후대에 조선 말기 최고의 경세서(經世書)로 평가받는다.
1904년 특사로 석방된 후 도미(渡美)한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제무대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 활동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승만은 워싱턴과 상하이를 오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지만, 임정 지도부 내 갈등으로 탄핵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 직전까지 미주 한인사회에서 한인들을 계몽·조직하고 영문 잡지 발간과 저술을 통해 한국의 처지를 미국 정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이런 해외 독립운동 경력은 광복 후 그를 ‘건국 지도자’로 떠오르게 한 밑바탕이 되었다. 1945년 10월, 33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이승만은 일제 패망 후 혼란한 정국에서 반탁운동과 단독정부 수립론을 내세우며 두각을 나타냈다. 미·소 군정하에서 그는 공산 세력에 강경히 맞서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좌우합작 노선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다졌다. 결국 유엔 결의로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고 이승만은 압도적 지지를 받아 제헌 국회의장에 선출된 후 국회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73세의 노정객(老政客)이 된 그는 스스로를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자 반공(反共)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며 새로운 국가의 운명을 이끌기 시작했다.

제2대 대통령 선거대표 대형 초상화, 입간판이 빼곡히 들어선 거리(1952) ©연합뉴스


이승만 대통령 재임 중 평가받는 공적
1948년 출범한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은 식민지 폐허 위에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세우며 ‘건국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지원을 이끌어내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UN 가입 기반을 닦았고,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는 대한민국의 존망을 건 투쟁을 진두지휘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의 국가 존망 위기에서 지도력을 발휘해 국가를 방위했다는 점에서 처칠과 비견된다”는 평가처럼, 공산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를 수호한 전시 지도자 역할을 한 것이다. 전쟁 말기 미국이 정전 협정을 추진할 때 이승만은 북한의 완전 격퇴와 통일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1953년 6월에는 반공포로 2만5천여 명을 전격 석방하여 정전 협상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고집은 미국을 긴장시켰지만, 결국 미국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안보 보장을 약속받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그 결과 체결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미동맹의 초석이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또 1949년 농지개혁법을 시행하여 봉건적 지주-소작 제도를 해체하고 다수 농민을 자작농으로 만들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봉건적 지주제를 타파하고 소작농들을 자기 땅을 가진 자유인으로 만든 혁명적 계기로 평가되며, 한국전쟁 중에도 남한 농민들이 공산정권에 동조하지 않게 만드는 데 작용했다.
아울러 1952년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는 ‘평화선’을 선포하여 인접 해양에 대한 대한민국의 주권을 주장,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로 확고히 편입시킨 조치는 일본의 반발을 불러왔으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영토 수호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건국과 전쟁, 토지개혁과 영토 수호 등 초기 국가 건설 과정에서 여러 성취를 남겼다.

이승만의 권력욕과 국정 실패
그러나 이승만 치세의 성취는 곧 권력 남용과 국정 실패로 그 빛을 잃어갔다. 그는 집권 후 민주주의의 기본질서인 권력 견제와 교체 원리를 무시하고 종신 집권을 꾀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계엄을 선포하고 반대파 의원들을 탄압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강압 통과시킨 데 이어, 1954년에는 재적의원 3분의 2에 미달한 표로 부결된 헌법 개정안을 ‘사사오입’이라는 황당한 산술 논리로 뒤집어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강행했다.
이 헌정 농단으로 이승만은 합법적으로 3선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령(81세)임에도 재선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장기 집권 속에 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만연하여 국민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비전도 부족했다. 1950년대 말 이승만 정권은 미국 원조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경제개발에는 소홀하여 국가 재정과 경제는 정체 상태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1956년 선거에서 야당 후보 신익희의 급서로 어부지리 승리를 거머쥔 이후, 이승만은 민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권좌 연장에만 집착했다. 1959년 유력 야당 인사 조병옥마저 선거 직전 사망하자, 1960년 그는 사실상 경쟁 없는 4선 승리가 확실시되었음에도 부통령에 자신의 측근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준비했다.
결국 1960년 3·15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는 공공연한 관권 개입과 투표 조작이 자행되어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치욕으로 남은 ‘3·15 부정선거’가 벌어졌다. 이처럼 권력욕에 눈이 먼 지도자의 오만은 건국 영웅의 명성을 스스로 갉아먹고 정권의 정당성을 뿌리째 흔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승만 집권 당시의 주요 사건과 스캔들
이승만 집권 12년 동안 숱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그중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먼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1949년에는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 사건이 발생하여 남한 내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 진압이 이뤄졌다. 특히 제주 4·3사건 진압 과정에서는 수만 명의 양민이 희생된 바 있는데, 이는 신생 정권이 취약한 통치 기반을 공포정치로 다지려 한 비극으로 기억된다. 6·25전쟁 발발 직전에는 ‘국민보도연맹’ 가담자 등 좌익 의심 인사들을 예비 검속하여 집단 처형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전쟁 초기인 1950년 7~9월 사이 정부와 군·경이 민간인 10만 명 안팎을 적법 절차 없이 학살한 이 사건은 훗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로 실체가 일부 규명되었으며, ‘이승만 정부의 전국적인 대량 학살’로 공식 확인되었다.
전쟁 중인 1951년에는 군 고위층의 부패로 수만 명의 훈련병이 아사(餓死)한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져 국민적 공분을 샀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등 헌정을 유린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처럼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전쟁의 혼란 속에 대규모 인권 유린과 부정부패, 헌법 파괴 행위가 속출하여 국가의 기틀을 흔들었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인 부정과 비리를 일삼으며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조봉암이 30% 이상의 지지를 얻으며 돌풍을 일으키자, 정권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을 꾸몄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에서 정부는 조봉암을 북한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고, 1959년 7월 결국 그를 사형에 처했다.
훗날 2011년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며 명백한 사법 살인으로 판명된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 탄압을 상징한다. 언론에 대한 탄압도 극에 달해, 정권 말기인 1959년 4월에는 당시 야당 성향 신문이던 《경향신문》이 정부 비판적인 사설을 실었다는 이유로 강제 폐간당했다.
정부는 군정 시절의 비상조치를 악용해 발행 허가를 취소하고 필자인 주요한과 사장까지 구속함으로써 언론 자유를 짓밟았다. 이 밖에도 관권선거와 금권정치가 판을 쳐 각종 부정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자유당 정권은 선거철마다 폭력배를 동원해 야당 유세를 방해하고, 공무원 조직을 총동원하여 조직표를 관리했으며, 3·15 부정선거 때는 아예 투표함 바꿔치기와 유권자 위협까지 감행했다. 이러한 부정행위의 누적은 국민의 공분을 쌓아 올렸고 결국 1960년 봄,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남으로 입적된 이강석(사진 왼쪽)이 경무대에서 이 대통령 내외와 친부인 이기붕 민의원 의장 내외와 친동생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연합뉴스


이승만 대통령 가족과 측근 관련 논란
이승만 개인을 둘러싼 가족과 측근 관련 사건들도 적지 않았다. 우선 그는 1950년대 중반 후계 문제를 염두에 두고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입양하였는데, 이를 두고 장기 집권 후 권력을 세습하려는 포석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이승만이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하자, 남겨진 이기붕 일가는 충격 속에 비극적 선택을 했다. 4월 28일 이승만의 경무대 별채에서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와 부인, 양자 이강석 등이 동반 자살하거나 피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권력의 주변인들까지 파국을 맞는 처참한 결말이 세상에 드러났다. 한편, 프란체스카 여사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승만 부인은 외국인 영부인으로서 세간의 호기심과 함께 몇 가지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그녀가 국정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거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말년 하와이 망명 시절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조용한 삶을 마감한 그녀의 모습은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승만 자신은 아들이 없어 양자 이강석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그마저 비극을 맞았고, 친인척 중 특별히 권력을 누린 이는 없었다. 다만 집권 후반 측근 정치인들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국정 문란을 초래한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대표적으로 자유당 실세였던 이기붕에게 국회의장과 부통령직을 겸하게 하고 사실상 권력을 나눠준 것은 국정 균형을 무너뜨린 처사였다. 또한 경무대 경호실장 등을 지낸 일부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전횡을 방치해 민심 이반의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가족과 최측근을 둘러싼 논란들은 이승만 통치의 일면을 드러내며, 지도자의 개인적 판단이 역사에 미치는 파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
이승만 정권은 자신을 비판하거나 견제하려는 정치적 반대자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광복 직후부터 그는 건국 노선을 둘러싼 경쟁자들을 배척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한 백범 김구가 1949년 6월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사건은 그 배후를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승만에게 최대 정적이었던 김구의 제거로 이어져 권력 독점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같은 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 청산을 시도하자 이승만은 오히려 경찰을 동원해 특위 사무실을 습격·해산시켜버렸다.
일제 경찰 출신 등 친일 인사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통치 기반으로 삼은 그는, 민족정기의 문제보다 현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것이다. 집권 기간 내내 이승만은 좌익세력뿐 아니라 온건 야당 인사들까지 폭넓게 ‘국시(國是)의 반대자’로 규정하며 탄압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부상한 민주당 등 야당 정치인들은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을 받았고, 경우에 따라 투옥이나 선거 출마 방해를 겪어야 했다. 앞서 언급한 조봉암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인 반대파 제거 사례다. 1958년 정부는 진보당 간부들을 공산주의 체제 전복 음모 혐의로 일제 검거하여 다음 해 조봉암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1958년 7월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 등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사형시킨 정치 탄압 사건’이라는 기록처럼, 이는 경쟁 정파를 아예 법적으로 말살해버린 사례였다. 이승만의 오랜 동지였다 야당으로 돌아선 장면, 윤보선 등도 각종 명목으로 정치 활동을 제한받았다. 1959년에는 야당 신문 폐간 외에도,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원내 발언을 문제 삼아 제명하는 등 입법부에까지 압력을 가했다. 또한 정권 연장에 장애가 되는 선거제도나 헌법 조항은 공권력을 동원해 변경하거나 무력화했다. 야당과 비판언론은 “독재 정권에 의해 숨 쉴 공간마저 빼앗겼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이승만 정권의 반대 세력 탄압은 비단 야당과 정치권에 국한되지 않았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요구, 언론의 비판적 논조, 나아가 거리의 민심까지 모두 공산주의 혹은 국가 전복 세력의 사주로 매도되기 일쑤였다. 1960년 2월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자 정권은 이를 공산주의자의 선동으로 몰아 수백 명을 연행했고, 언론 보도를 차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 통치는 오히려 국민의 분노를 누적시켜 결국 4·19혁명이라는 폭발을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은 만년에 가서야 민심의 두려움을 깨달은 듯하다. “학생이란 이름으로 위장한 공산 폭도가 소요를 일으켰다”던 초기 입장에서 물러나 그는 4·19혁명 열흘 후 하야(下野) 성명을 내고 하와이로 떠났다. 그제서야 그는 “국민이 원하면 언제든 하야할 용의가 있다”고 했지만 때는 늦었다. 독립운동가 시절부터 한평생 신념으로 삼았던 반공 투쟁이 그의 정치 탄압을 정당화하는 방패막이가 되었을지 모르나, 정작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는 그의 통치 아래 철저히 짓밟혀 있었다.

원자로 기공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1959) ©연합뉴스


이승만 시대의 역사적 교훈
이승만의 12년 통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빛과 그림자를 극명하게 남겼고, 그로부터 얻는 교훈 또한 분명하다.
첫째로, 민주주의의 요체는 권력의 유한성임을 그의 몰락이 웅변적으로 증명했다. 국부로 칭송받던 지도자도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한 채 권력을 사유화하면 결국 민심에 의해 축출된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고사가 있듯 이승만도 장기 집권 끝에 12년 만에 쓸쓸히 권좌에서 밀려났으며, 이는 이후 어떤 정권도 영구집권을 꿈꿀 수 없도록 만드는 경고가 되었다. 실제로 4·19혁명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원형이자 대한민국 시민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국민 주권을 농락한 부정선거에 분연히 항거한 4·19는 헌법 전문에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될 만큼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곧바로 뒤이은 장면 내각의 출범과 1960년대 민주당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으나, 안타깝게도 1년 만에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다시 민주주의가 중단되고 만다. 이는 한국 사회가 이승만 시대의 교훈을 완전히 소화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박정희 등의 권위주의 정권도 결국 4·19가 남긴 ‘독재 타도’의 시민정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1987년 6월항쟁으로 막을 내렸다. 이승만 시대의 비극은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으며, 헌법은 대통령 중임 제한 조항을 두어 또 다른 이승만의 출현을 예방하고 있다.
둘째로, 냉전과 분단이라는 특수한 역사 환경에서 얻는 교훈이 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맞선다는 명분 아래 온갖 권위주의를 정당화했지만, 결과적으로 분단 상황에서 과도한 이념 정치와 남북 대결 일변도의 정책은 국민 통합에 장애가 되었고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그의 강경한 반공 노선은 6·25전쟁 시기 국가 존립을 지키는 데 공헌했고, 이후 대한민국을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 견인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분단 극복이나 평화 통일에 대한 비전보다는 당장 정권 유지와 북진통일 의지 표명에 급급했다. 그 결과 평화선 선언 등 국토 수호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결국 통일도 못 이루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채로 전쟁 전보다 더 악화된 분단 상황만 남겼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승만 시대는 우리에게 이념과 안보를 내세운 국가 권력이 어떻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발전에 어떤 한계를 초래하는지를 가르쳐준다. 냉전이 끝난 지 오래인 오늘날에도, 안보와 이념 논리가 정치에 동원될 때 우리는 이승만 시대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과도한 이념 대립과 권력 집중이 부른 비극을 기억하는 것만이 동일한 역사의 반복을 막는 길이다.
셋째로, 국민의 힘과 시민의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이승만 정권의 종말은 결코 외부 압력이나 상부 지시로 오지 않았다. 4·19혁명이라는,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귀한 희생이 있었지만, 결국 “부정을 보고서도 일어서지 않는 민족이라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행동으로 증명했다.
이승만은 비록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부로 대접받았으나, 민심을 거스르면 누구도 권좌를 지킬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의 퇴진 이후 국민은 정치의 주체로서 서서히 성장해갔고, 군사독재 시절을 거쳐 마침내 1987년 민주화를 이뤄냈다. 이렇듯 이승만 시대는 한국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에 눈뜨는 산고(産苦)의 시간이었다.
오늘날 촛불시위와 같은 평화적인 시민 저항이 헌정질서 수호의 최후 보루로 인식되는 데에는 4·19의 유산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이승만 시대의 교훈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우리는 더 나은 민주공화국을 향한 길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 성품과 인간적 면모
역사 속의 이승만은 흔히 권위주의적 정치인으로 그려지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들여다보면 복합적인 모습이 보인다. 그는 청년기에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개신교도였으며, 영어에 능통한 국제파 엘리트였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서구식 토론 문화와 민주주의 이상을 배웠으나, 동시에 식민지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강한 민족주의적 사명을 가슴에 품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일생을 선지자적 지도자 의식으로 살게 했다. 스스로 국민을 계몽하고 이끌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그는 때로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장면 총리는 이승만의 성격에 대해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이승만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아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가졌고, 주변 인물들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러한 자기 확신과 아집은 독립운동 시절에는 굳은 의지로 비쳤으나, 집권 후에는 독선적인 국정 운영과 측근들의 부패를 방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 이승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 센 할아버지 같은 인간적 일화들도 남겼다. 80대의 고령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그는 측근들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의지하는 일이 많았고, 때로는 참모들의 건언(諫言)을 듣지 않아 문제를 키웠다. 하지만 개인 생활에서는 의외로 소박하고 검소했다는 증언도 있다. 해방 후 그의 일정을 기록한 이들은 “그는 양말이나 속옷을 몇 번이나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한 대통령이었다”고 회고하며, 권위적인 공적 모습 뒤에 소박한 생활 습관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평생 간직해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고, 주일에는 가능하면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신앙심은 반공주의를 ‘십자군 운동’에 비유하고 스스로를 구국의 지도자로 여기는 그의 정치적 신념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그는 공산주의를 인간 본성에 반하는 악으로 규정하고, “공산 전체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피력하곤 했다.
이승만의 인간적 면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외로움과 비극이다. 그는 수십 년 망명객으로 지내며 외롭게 투쟁했고, 말년에는 결국 자신이 세운 나라에서 쓸쓸히 축출되어 타국 땅에서 생을 마쳤다. 1960년 4월 하야 후 하와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 그의 모습은 지팡이에 의지한 85세 노인이었다. 하와이 망명 생활에서 그는 대중 연설로 수십만을 휘어잡던 권력자의 모습은 잊힌 채, 소수의 측근과 아내만 곁에 둔 채 지냈다.
말년의 이승만은 우리말 대신 영어 성경을 읽고 옛 독립운동 동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국의 소식을 궁금해했다고 한다. 건강이 악화되어 1965년 7월 눈을 감을 때까지, 그는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박정희 정부는 유해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고, 반공 영웅으로서 일정 예우를 했다. 그러나 생전의 이승만은 끝내 조국으로부터 공식 사과나 복권(復權)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죄인’이라는 오명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개인적으로는 비극적 최후였지만, 역사 앞에서는 본인의 행동에 따른 응분의 책임을 진 셈이다. 이처럼 이승만의 삶은 파란만장한 영욕(榮辱)으로 점철된 한 인간의 서사시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 3주년 기념행사에 참석, 치사를 하고 있다.(1953) ©연합뉴스


이승만이 원했던 역사 속 본인의 모습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이승만은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어떻게 남을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살아 생전 자신을 ‘건국대통령’ 또는 ‘국부(國父)’로 칭하며, 대한민국의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1948년 취임사에서 “이 나라를 세우는 초석이 되겠다”고 밝힌 그는, 조선의 이승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이승만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 만년의 이승만은 워싱턴, 처칠, 아데나워 등 세계사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종종 자신을 견주곤 했다.
새로운 공화국을 창건한 조지 워싱턴, 조국을 전쟁에서 구한 윈스턴 처칠, 분단국가를 일으켜 세운 콘라드 아데나워에 버금가는 역할을 자신이 해냈다고 믿었으며, 역사도 그렇게 평가해주길 기대했다. 1950년대 국정연설과 저술에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반공 투쟁을 거듭 강조하면서, 자신이야말로 나라를 지킨 구국의 영웅임을 천명했다. 그는 자신을 “자유민주의의 신봉자”라 칭하고, 공산 침략을 막아낸 것은 본인의 지도력 덕분이라고 자부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나의 작품”이라는 식의 발언으로 본인의 건국 업적을 누차 강조했다. 이러한 언행에서 알 수 있듯, 이승만이 바란 역사 속 본인의 모습은 위대한 건국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 이승만은 자신의 명예 회복을 은근히 기대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1960년대 장면, 박정희 정부는 모두 공식적으로 그를 몰락한 독재자로 취급했고, 국민도 “늙은 독재자가 쫓겨났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중에 남긴 편지에서 “내가 한 일이 훗날 올바르게 평가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토로했지만, 생전에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공적(功績)이 과오(過誤)를 훨씬 능가한다며 재평가를 호소했으나, 당대의 평판은 가혹했다. 결국 역사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구상은 상당 부분 좌절된 셈이다. 다만 냉전체제가 끝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21세기 들어 이승만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흥미롭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가 과오를 훨씬 능가한다”면서 그의 기념관을 건립하고 동상을 세우려는 시도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마도 이승만 본인이 꿈꾸던 역사적 위상을 되찾아주려는 노력일 것이다. 실제로 보수 진영 인사들은 그를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건국 영웅으로 재정립하려 하고, 현직 대통령이 3·1절 경축사에서 이승만을 “외교 독립운동의 선각자”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변화는 이승만이 그토록 바라던 ‘역사적 재평가’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재평가가 진정한 존경의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가 생전에 바란 ‘국부로서의 영예’는 오로지 후세의 판단에 달려 있다. 역사는 칼날 같은 냉엄함으로 그의 공과(功過)를 모두 기록해두었으며, 이제 우리 사회가 어떠한 기준으로 그를 기억할지 숙고하고 있을 뿐이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 포스터 ©연합뉴스


이승만이 오늘날 정치와 시민사회에 주는 교훈
이승만의 역사적 유산은 현대 한국 사회에 여러 실용적 교훈을 제공한다. 먼저, 정치 지도자의 권력욕은 반드시 견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권력자 주변에는 아부와 충성을 일삼는 이들이 모이고, 성과를 부풀려 선전하며, 비판 세력을 배척하려는 유혹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행태가 지속되면 결국 민심이 등을 돌린다는 것을 이승만의 몰락이 보여준다.
최근 민주사회에서 지도자를 “제2의 이승만”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권위주의적 통치와 민주주의 후퇴를 경계하는 의미일 터이다. 지도자는 국민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며, 국민이 원하면 언제든 권좌에서 물러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승만의 말년이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헌법과 법치, 선거의 공정성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4·19 이전 자유당 정권의 타락상을 반면교사 삼아,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준수하는 청렴한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또한 시민사회의 역할과 책임을 일깨운다는 점도 중요한 교훈이다.
오늘날 한국 시민들은 세계가 놀랄 만큼 성숙한 민주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4·19혁명으로 상징되는 시민 저항의 전통이 있다.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여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민주 국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임을, 이승만 시대의 경험이 가르쳐준다. 특히 정치권력이 역사 청산을 가로막거나 과거를 왜곡하려 할 때, 시민사회는 이를 감시하고 바로잡을 책무가 있다. 최근에도 이승만을 미화하는 일부 움직임에 대해 3·15의거 유족과 광복회 등 단체들이 “역사 왜곡이자 반헌법적 행태”라고 규탄하며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처럼 깨어있는 시민들의 비판이 있어야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반대로, 무관심하거나 맹목적으로 권력을 추종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면 이승만 시대와 같은 오류가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시민들은 과거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권력 남용의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끝으로, 분열이 아닌 통합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승만 통치는 극심한 이념 대립과 지역·진영 갈등을 빚어냈고, 이것이 결국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 비극을 낳았다. 현대의 지도자들은 과거를 반추하여 국민 분열을 조장하는 편가르기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아야 한다. 남남갈등이나 진영 논리에 편승한 정치는 단기적 이익을 얻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이승만 정부가 6·25 전후, 좌우 갈등 속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도 끝내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큰 교훈(教訓)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다양성이 존중되는 민주사회이며, 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서로 이간질하거나 상대 진영을 적대시하는 정치는 설 자리가 없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과오와 몰락은 우리 현대사의 거울이자, 미래를 위한 수업 교재(教材)다. 우리가 그에게 배우는 바를 올바로 새긴다면, 대한민국은 그의 시대보다 한층 성숙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갈 것이다.
반대로 그의 잘못을 잊거나 미화한다면, 같은 실수가 반복될 위험이 도사릴 것이다. “이승만은 정말 나쁜 지도자였다”는 신랄한 평가도 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객관적 재평가 요구도 존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있는 그대로 역사에서 배우는 자세일 것이다.
이승만이 꿈꾸었던 ‘자유롭고 강한 대한민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퇴진 이후 비로소 서서히 현실이 되어갔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그의 공은 계승하고 과는 반복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분별하는 일이다. 그것이 독립운동가 이승만, 독재자 이승만이 후세에 남긴 복합적 유산을 제대로 소화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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