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협력해 추진 중인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이 다섯 번째 인물, 고창일 선생의 삶과 항일투쟁을 새롭게 조명한다.
함경북도 경원(慶源) 성내리 81번지.1892년 4월 6일, 북방 국경의 작은 고을에서 태어난 한 청년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세계의 언어로 호소한 외교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그의 이름은 고창일, 러시아식 이름 니콜라이 키릴로비치였다.
그는 일찍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달냐워스톡대학을 졸업한 뒤 징병으로 러시아제국 장교로 종군했지만, 그의 삶의 방향은 군복이 아닌 조국을 향해 있었다. 식민지 조국을 잃은 민족의 고통은 끝내 그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재러 한민족 사회가 하나로 결집하자, 그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19년 1월, 이 조직이 해외 한민족의 최고 대표기구를 표방한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자, 고창일 선생은 조직과 외교, 연대를 중심으로 한 활동의 중심에 섰다. 총칼이 아닌 국제 여론과 사상적 결집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한 선택이었다.
1910-1945 시기 연해주 독립운동 관련 기록사진
같은 해 그는 윤해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대한국민의회 대표로 선발됐다. 1919년 9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회의는 이미 폐회된 뒤였지만,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프랑스어로 〈한국의 독립과 평화〉, 〈자유한국〉을 발표하며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의 외침은 세계를 향해 이어졌다.
1920년 상해를 거쳐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문창범을 중심으로 박용만, 유동열 등과 함께 이르크츠크 일대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노선을 논의했다. 이어 유동열·김하석·최고려·안병찬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이른바 이르크츠크파 공산당을 조직하며 조직적 투쟁의 기반을 마련했다.
1923년에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며 독립운동 진로를 둘러싼 창조론과 개조론의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고창일 선생은 이 가운데 기존 조직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독립운동 체제 수립을 주장한 ‘창조파’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이후에도 그의 활동은 계속됐다. 1933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 길림성 화룡현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했고, 1944년에는 함흥과 원산 일대에서 동지를 규합하며 하얼빈을 오가는 비밀스러운 활동 끝에 광복을 맞았다. 망명과 지하, 해외와 국내를 넘나든 그의 삶은 해방을 향한 집요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광복 이후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 현장으로 나아갔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8년 초대 외무부 차관, 1949년 외무부 장관 서리로서 대한민국의 UN 가입 신청을 주도했다. 망명지에서 독립을 외치던 인물은, 이제 국가의 이름으로 세계와 마주한 외교 책임자가 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또 다른 비극 속에서 그는 납북됐다. 삶의 마지막은 여전히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분명하다. 총 대신 언어로, 국경 대신 세계를 향해 조국을 호소한 독립운동가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훈장의 이름만이 아니다. 상해의 논쟁 한가운데서도, 파리의 닫힌 회의장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한 사람의 목소리. 고창일 선생의 삶은 독립이 해방의 순간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끝까지 감당해야 할 책임의 역사임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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