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은 현재 진행 중인 ‘고려인 한글문학 기획전’을 통해, 소련 시기 고려인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김증손(1918~1970)의 대표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강제이주의 한 세기가 남긴 아픔과 희망을 배경으로, 김증손의 시를 단순한 문학 창작물이 아닌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어진 고려인 공동체의 생활사를 기록으로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김증손의 시는 특정 사건이나 영웅적 장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하루의 노동, 반복되는 계절, 말없이 이어지는 삶의 태도를 통해 고려인 공동체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울부짖음이나 과장된 비극 대신, “우리는 이렇게 하루를 살았다”는 낮은 목소리가 작품 전반을 이끈다. 이러한 절제된 언어는 오히려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견딤의 무게를 더욱 선명하게 전하고 있다.

강제이주 이후 노동의 삶을 기록한 시인 ‘김증손’/사진=고려인마을 제공

그의 대표 작품들에는 몇 가지 핵심 이미지가 반복된다. 강제이주 이후 주어진 삶의 조건이자 새로운 삶을 일구어야 했던 공간인 ‘황무지와 들판’, 삽질과 수확, 반복되는 손의 움직임을 통해 체념이 아닌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노동의 몸짓’, 그리고 희망과 절망을 선언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김증손의 시는 ‘비극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은 비극을 전하는 시’로 평가된다.

김증손은 1918년 연해주 지역 고려인 사회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가족·공동체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돼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정착했다.

연해주의 언어와 기억을 품은 채 황무지로 내몰린 세대로서, 그는 집단농장과 공장 노동, 공동체 생활 속에서 ‘살아남는 일 자체가 투쟁이던 시대’를 통과했다. 그리고 1970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삶 속에 스며든 고려인의 삶과 노동의 역사를 시로 기록해 나갔다.

그의 시 세계의 핵심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강제이주와 상실의 기억이다. 끊긴 뿌리와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말하지 못한 침묵의 슬픔이 시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된다. 둘째, 노동과 인간의 존엄이다. 국가의 서사가 아닌, 노동하는 ‘사람의 삶’에 초점을 둔 시선이 그의 작품을 관통한다. 셋째,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다. 러시아어 환경 속에서 한글을 잃지 않고자 시를 써야 했던 고려인 시인의 현실은, 그의 작품 전반에 역설적 긴장으로 남아 있다.

문학사적으로 김증손은 리 알렉산드르, 김해운, 김기철 등과 함께 소련 고려인 문학의 제2세대 시인 군에 속한다. 초기 연해주 시기의 문학이 민족의식과 언어 보존에 방점을 두었다면, 김증손이 속한 2세대는 강제이주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했다.

그는 공동체의 고통을 이념이나 집단적 구호로 환원하지 않고, 개인의 하루와 노동의 감각으로 축소해 시에 담음으로써 ‘기억의 시에서 생활의 시로 전환되는 지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김증손의 시는 오늘의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역사는 거대한 사건으로만 남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하루 속에서도 이어지는가.” 다. 이는 광주 고려인마을이 축적해 온 생활사 기록과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 그리고 현재 이주민 공동체의 현실은 그의 시 세계와 깊이 맞닿아 있다.

그의 시가 오늘날 다시 읽히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에 머문 문학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증손의 대표 작품들은 고향을 되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기록한 시의 언어는, 광주이주 고려인동포들에게 견뎌온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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