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김성민 회장

취재 현장에서 녹취는 사실을 고정하는 못과 같다. 말이 흔들릴 때 기록은 증거가 되고, 권력이 말을 뒤집을 때 녹취는 책임을 붙잡는다. 다만 못이 문을 고정하듯 쓰일 때만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녹취가 문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등을 겨누는 칼이 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2018년 이준석을 둘러싼 ‘통화 녹취’ 논란이 상징적 장면이었다.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녹취록이 꺼내지고, 그 조각이 여론을 재단하며 관계를 파괴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필자 역시 취재를 위해 자동 녹음 기능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2018년 이준석의 ‘녹취록 논란’을 계기로 불편을 선택했다. 신뢰를 전제로 나누는 사적 대화까지 습관적으로 저장하는 순간, 언젠가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비겁한 사람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편의가 윤리를 앞서면, 기록은 진실의 도구가 아니라 우월의 무기가 된다. 그래서 자동 녹음하는 취재용 전화와 개인용 전화 두 대를 쓰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불편은 비용이지만, 신뢰는 자본이다. 자본이 무너지면 거래도, 우정도, 공동체도 흔들린다.

법의 영역은 또 다르다. 한국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를 제3자가 몰래 녹음·청취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다. 반대로 전화 통화의 당사자 일방이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감청’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대법원이 판시해 왔다.

그러니 '합법'이라는 방패는 흔히 손에 쥐기 쉽다. 그러나 합법이 곧 정당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법이 허용하는 최소한을 윤리의 최대치로 착각하는 순간, 사람은 관계를 거래로 바꾸고, 대화를 함정으로 만든다.

최근의 한국 사회는 녹취록이 사건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면을 반복한다. 의원과 보좌진, 의원과 의원 사이에서 오간 말들이 특정 시점에 특정 문장으로 잘려 던져지고, 그 파편이 유일한 판단 근거처럼 소비된다. 그러면 사실 규명보다 낙인이 먼저 달라붙고, 맥락은 뒤늦게 따라온다.

말의 앞뒤를 자르면 의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비틀린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요즘은 반대로 말 한 토막이 천 냥 빚을 지게 만든다.

더 두려운 대목은, 이 과정이 사회의 기본 토대를 잠식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가까운 사람 앞에서 약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미숙한 말도 한다. 인간관계는 그 취약함을 품으며 성숙해진다. 그런데 대화가 언제든 녹음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상시화되면, 사람은 솔직함 대신 방어를 택한다. 위로도 고백도 사라지고, 남는 건 무균실 같은 문장뿐이다. 신뢰가 바닥나면 기록이 늘고, 기록이 늘면 신뢰가 더 마른다. 악순환이다.

갑질에 대한 준엄한 질책은 당연하다. 다만 그 반대편에서 ‘을질’이 면죄부를 얻는 순간도 경계해야 한다. 권력은 절제해야 하고, 약자는 복수의 칼맛에 중독돼서는 안 된다. 적반하장(賊反荷杖)처럼 역할과 책임이 뒤집히면, 조직은 규범을 잃고 사회는 질서를 잃는다. 건강한 상하관계란 복종의 문화가 아니라 책임의 문화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낡은 권위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각자 자리에서 지켜야 할 의무와 절제의 원칙을 오늘의 언어로 복원해야 한다.

희망찬 2026년을 맞아, 나는 ‘K-도덕’을 말하고 싶다. 초일류 국가는 숫자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신의성실(信義誠實)의 습관, 약속을 지키는 태도, 상대의 체면을 살리는 언어, 필요할 때만 기록하고 필요 없는 사적 대화는 지키는 절제가 국가의 품격을 만든다. 정치인과 언론인의 공적 책임을 위한 녹취는 더 정교해져야 한다. 동시에 신뢰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목적과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녹취가 진실을 지키는 방패가 되려면, 남을 찌르는 창으로 쓰지 않겠다는 자기 통제가 먼저다. 2026년은 기록의 시대를 넘어 신뢰의 시대를 다시 여는 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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