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제목 : 사람들은 말하지
사람들은 말하지, 내가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그 이야길 들으면 난 마냥 행복해진다네/난 아버지 얼굴의 모든 특징을 기억하고 있지/당신이 훌륭하고 멋진 분이셨음을 나는 알지
당신이 노래를 부르면 모두들 숨을 죽였지/멀리 어딘가에 있는 고향에 대한 노랠 부를 때면./그분들은, 물론 다는 아니지만, 그 뜻을 이해했지/심지어 당신은 모국어로 노래를 불렀으니까.
당신의 노래를 듣고 그 뜻을 알아챈 사람들/눈이 붓도록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나는 보았지/헌데 난 그분들이 왜 아파하는지를 몰랐다네,/그 뜻과 바람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셨는지도
나는 알지, 내가 아버지와 꼭 닮았다는 사실을/아버지의 나라에 살고 있어 나는 행복하다네,/그리고 그때 울던 분들의 눈물을 이해한다네,/그분들께 한반도는 바로 기억이자 사랑이었음을.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활동 중인 고려인 시인 김블라디미르의 시 〈사람들은 말하지〉는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해, 한 개인의 고백을 넘어 고려인 공동체가 겪어온 집단적 기억의 깊숙한 곳으로 독자를 이끈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라는 비극이 어떻게 한 가정의 기억을 통과해 후손의 삶 속으로 이어지는지를, 이 시는 담담하지만 강한 울림으로 전한다.
화자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말할 때마다 행복해진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닮음’은 외모에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그 얼굴 뒤에 숨겨진 세월과 고통, 말하지 못했던 삶의 무게까지 함께 끌어안고 있음을 암시한다. 시 속의 아버지는 “훌륭하고 멋진 분”이었고, 그 존재는 이미 화자의 정체성 깊숙이 새겨져 있다.
조국을 향한 노래, 노래와 눈물로 이어진 고려인의 기억/사진=고려인마을 제공
작품의 정서적 중심에는 ‘노래’가 놓여 있다.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것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고향”에 대한 노래였다. 모두가 그 뜻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국어로 불린 그 노래의 의미를 알아들은 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시는 이 장면을 통해, 고려인 강제이주 세대의 고통이 설명이나 기록보다 먼저 노래와 울음이라는 방식으로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고향을 잃은 이들에게 노래는 기억의 그릇이었고, 눈물은 말 대신 흘려보낸 역사였다.
화자는 솔직히 고백한다. 어린 시절의 그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아파했는지 알지 못했다고. 무엇을 그리워했고, 무엇을 되찾고자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는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현재의 화자는 “아버지의 나라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그때 흘러내렸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고려인 후손이 조상의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며 비로소 세대 간 감정의 언어를 해독해 나가는 과정이자, 기억이 현재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이 시에서 한국은 더 이상 추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그분들께 한반도는 바로 기억이자 사랑”이었다는 마지막 고백은, 강제이주 세대에게 조국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단정적으로 말해준다. 돌아갈 수 없었기에 더 깊어졌고, 말할 수 없었기에 더욱 간절했던 사랑의 대상, 그것이 바로 조국이었다.
〈사람들은 말하지〉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한국어 번역본과 러시아어 원문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다. 러시아어는 중앙아시아에서 형성된 고려인들의 삶의 언어이고, 한국어는 귀환 이후 다시 마주한 언어다. 두 언어가 나란히 놓인 이 형식은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분열이 아니라 공존, 단절이 아니라 겹침의 언어다.
이 시를 쓴 김블라디미르 시인의 삶 또한 작품의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든다. 그는 한때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문학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 의과대학 러시아어문학과 학과장으로 30여 년간 강단에 섰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광주 인근에서 공장 일과 농촌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사과와 배, 감을 따고, 배추와 무를 수확하는 현장이 그의 일터다. 학문과 노동, 지성과 육체를 모두 살아낸 그의 삶은 이 시를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삶의 증언으로 읽히게 한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두고 “개인의 가족사가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되는 지점에서 시가 기록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말하지〉는 고려인 강제이주 세대의 침묵과 후손 세대의 이해가 만나는 자리에서 태어난 시다. 그리고 지금도 고려인마을의 현재 속에서, 기억과 사랑을 잇는 언어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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