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협력해 추진 중인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의 세 번째 인물 고명수(1882~미상) 선생의 삶과 항일투쟁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번 연재는 이름조차 기록에서 흐릿해진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들의 발자취를 다시 복원하는 역사적 여정이다. 그 세 번째 주인공인 고명수 선생은 1918년부터 1923년까지 러시아 극동과 연해주 전역에서 항일 무장투쟁과 조직 활동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다.
사진: 블라디보스토크 1918–1922 시기 기록사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이흥삼 등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그는, 이미 그때부터 국경을 넘어선 항일투쟁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1919년 독립군 부대에 입대한 이후, 1921년 극동공화국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에 도착해 니항군대 부관으로 활동했으며, 곧 고려혁명군 제2중대 중대장으로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전선의 한복판에서 그는 고려인 독립군의 생존과 조직을 책임졌다.
1922년에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우르간 한인분대 소속으로 참석해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에도 힘을 보탰다. 이듬해 초 무장해제가 이뤄진 뒤에도 그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고려혁명당 선전부장으로 지방대회에 참여했고, 1923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편성된 고려공산당 혁명중앙부 군사부 산하 특립군대 제1연대장을 맡아 다시 조직을 세웠다. 같은 해 6월에는 공산청년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며 당 간부와 민회를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수행했다.
총을 잡았다 내려놓고, 다시 조직을 세우는 반복 속에서도 그의 선택은 늘 하나였다. 바로 ‘조국’이었다. 이름보다 뜻을 앞세우고, 개인의 삶보다 사명을 먼저 놓았던 그의 인생은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단면이자 증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려 2014년 고명수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의 묘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후손 역시 확인이 필요한 상태다. 광주 고려인마을과 고려신문은 이번 연재를 통해 고명수 선생의 기록을 세상에 다시 불러내는 데서 나아가, 후손을 찾고 기억을 현재로 잇는 실질적 지원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광주 고려인마을 관계자는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은 국경과 이념, 체제를 넘어 이어진 항일의 역사”라며 “고명수 선생의 삶은 디아스포라 고려인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던졌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라고 말했다.
이름 없는 연해주 고려인 선조들의 수많은 헌신을 통해 오늘의 광복을 만들었다. 따라서 고명수 선생의 이야기는 수많은 역사 중 하나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반드시 불러야 할 이름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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