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에서는 ‘고려인 한글문학 기획전’을 통해 강제이주의 한 세기 동안 공동체의 언어와 노래를 지켜 온 두 인물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주인공은 리 알렉산드르와 타쉬켄트 조선극장 배우 전명진(1924~1996년 경)이다.

전시는 고려인 선조들의 삶과 감정을 담아낸 ‘창가집’을 매개로, 말로 전해지던 노래가 어떻게 기록으로 남고, 기록이 어떻게 역사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고려인들은 모국어 구전가요와 창작가요를 모아둔 가요집을 ‘창가집’이라 불렀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자료는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 제9권인 「리 알렉산드르 창가집」(1945)이다. 이 창가집은 리 알렉산드르가 전명진의 부탁을 받아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약 8개월 동안 고려인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노래 171곡을 하나하나 손으로 적어 남긴 기록이다.

리 알렉산드르와 전명진이 기록한 창가집/사진=고려인마을 제공

이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려인 창가집 가운데 노래 수가 가장 많고, 만들어진 시기도 가장 오래된 자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수록곡 가운데 일부는 중복되거나 외국 노래를 번안한 사례가 있으나, 대부분은 당시까지 고려인 사회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우리말 가요다. 현재 4페이지(2곡)가 훼손된 상태이지만, 1946년 다른 필사자가 내지에 2곡을 보완해 오늘날 171곡이 전해지고 있다.

함께 공개된 제10권 〈전명진 창가집〉(1945)은 전명진이 직접 필사한 자료로, 총 49곡이 악보와 함께 수록돼 있다. 여러 곡의 말미에는 필사 연월일과 시간까지 적혀 있어 기록 당시의 현장을 생생히 전한다. 악보를 갖춘 고려인 창가집은 현재 이 자료가 유일하며, 가장 오래된 기록유산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들 창가집은 개인의 메모를 넘어 공동체의 기억이다. 가혹한 강제이주와 유랑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노래로 슬픔을 견디고, 언어로 정체성을 지켜냈다. 한 줄 한 줄 손으로 옮긴 노랫말은 총칼이 아닌 펜으로 이어 온 생존의 역사였다.

한편 국가기록원은 2020년 1월, 고려인마을이 소장한 유물 1만2천여 점 가운데 고려인 작가·문화예술인의 육필 원고 21권과 고려극장 사진첩 2권 등 총 23권을 국가지정기록물로 등재했다. 이 기록물은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제1호), 이승만 대통령 기록물(제3호), 조선말 큰사전 편찬 원고(제4호), 도산 안창호 관련 미주 국민회 기록물(제5호), 3·1운동 독립선언서류(제12호)에 이어 제13호로 지정되며 공인된 가치를 인정받았다.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은 “창가집은 단순한 노래 모음이 아니라, 말과 글이 끊기지 않도록 이어 온 고려인들의 집단적 기억”이라며 “광복 80주년을 계기로 이 기록들이 지닌 역사·문화적 의미를 시민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 2월 말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강제이주의 비극을 넘어, 기록으로 남은 노래가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를 조용히 전하고 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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