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추운 날씨에 겨울비까지 내리는 명동에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관광객들로 북적북적한 모습이었다. 사진은 어느 한 유명 식당 앞에 우산을 쓴 채 입장을 기다리는 대기줄이 길게 이어진 모습.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올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객 수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은 관광업계와 정부 모두에 반가운 성적표다. 코로나19 이후 얼어붙었던 국제 이동이 완전히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고, K-팝과 K-드라마, K-푸드로 상징되는 한류의 영향력 역시 여전히 견고하다는 점을 수치로 확인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명동과 홍대, 제주와 부산의 주요 관광지는 다시 외국어 간판과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항공과 숙박, 유통업계는 “완전한 회복을 넘어 새로운 기록”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문체부는 외래 관광객 역대 최대 기록을 기념해 23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1850만번째 입국 관광객을 맞이하는 환영 행사를 진행했다. 김대현 문체부 제2차관은 1850만번째 방문객인 싱가포르 국적의 샬메인 리 씨에게 한복 목도리와 꽃다발을 전달했다. 하지만 한국, 정말 자화자찬하며 웃고 떠들 수 있는 상황일까?
이 같은 성과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기 어렵다는 시선도 적지 않다. 방문객 급증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로 ‘원화 가치 하락’이 지목되면서다. 달러와 엔화, 위안화 대비 약세를 보인 원화는 한국 여행의 체감 비용을 크게 낮췄고, 그 결과 한국은 ‘가성비 좋은 여행지’로 부각됐다. 숙박비와 식비, 쇼핑 비용까지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상황은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유인이 됐다.
실제 현장에서 만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반응은 이를 뒷받침한다. “예상보다 적은 비용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거나 “쇼핑 부담이 크지 않다”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일본과 동남아, 중화권 관광객 사이에서는 한국이 ‘짧고 효율적인 소비 여행지’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관광업계에서는 환율 효과 덕분에 체류 기간이 늘고, 1인당 지출도 일정 수준 유지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문제는 이 환율 효과가 한국 관광 경쟁력의 본질을 얼마나 설명해주느냐는 점이다. 원화 약세는 관광객 유입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한국 경제 전반에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수입 물가 상승과 국내 소비 위축, 실질 소득 감소 등 부정적 파급 효과를 감안하면, 관광객 증가를 환율 덕분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씁쓸한 대목이다. ‘경쟁력이 강해져서 사람들이 찾는 나라’라기보다 ‘값이 싸져서 선택된 나라’라는 인식이 굳어질 경우, 중장기적으로는 브랜드 가치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3일, 추운 날씨에 겨울비까지 내리는 명동에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관광객들로 북적북적한 모습이었다. 사진은 비를 맞으며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이동중인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
"환율을 보고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23일 오후, 추운 날씨에 비까지 내리는 궃은 날씨가 무색할만큼 명동 일대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곳곳에서 3~4명씩 무리를 지어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여행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우산을 쓴 인파 사이로 각국의 언어가 뒤섞여 흘러나왔고, 화장품 매장과 환전소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비에 젖은 네온사인이 아스팔트 위로 번지듯 비치고, 그 아래서 외국인 관광객들은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잠시 멈춰 서서 쇼윈도를 들여다봤다. 비가 오는 평일 오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명동은 다시 ‘관광의 중심’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들의 한국어 인사 뒤에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가 연이어 이어졌다. 한 화장품 매장 앞에서 만난 중국인 여행객 (구이잉·28)은 계산대에 놓인 쇼핑 바구니를 가리키며 “환율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싸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숙박과 쇼핑, 식사 비용 모두 부담이 줄어들었다며 “이 가격이면 한국이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였다”고 설명했다. 비 오는 날씨도 여행 계획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다는 듯, 그의 표정은 가벼웠다.
지난 19일 외국인관광객들로 북적북적한 명동의 모습.
길 건너 환전소 앞에서는 중국 관광객들이 전광판의 환율 숫자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튀르키예에서 왔다는 한 여성(엘리프·37)은 스마트폰 환율 계산기를 켜 보이며 “며칠 전 다른 나라를 고민했지만, 환율을 보고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그는 “물가가 비싸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생각보다 부담이 없다”며 “이 정도면 쇼핑도, 음식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유명 식당 앞에서는 우산을 쓴 채 줄을 선 수십여명의 외국인 관광객들도 보였다.
명동의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자 길거리 음식 노점 앞에 사람들이 빗속에서도 줄을 섰다. 떡볶이 냄비에서는 김이 피어올랐고, 비 냄새와 어묵 국물의 향이 뒤섞였다. 비닐 우비를 입은 관광객들은 휴대전화로 서로의 모습을 찍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 중화권 관광객은 기자에게 “환율이 내려가서 짧은 일정이지만 여러 가지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왔다”며 “한국은 지금 동남아보다 더 가성비가 좋은 가장 ‘합리적인 여행지’”라는 표현까지 했다.
23일 오후 명동의 한 매장 진열대에 놓인 제품들이 비어있는 모습. 원화가치 하락이 외국인 관광객들의 쇼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눈길을 끈 것은 또 다른 이유로 한국을 찾았다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명동 중앙로에서 만난 한 여행객은 “일본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적인 정치적 이유라기보다는 “분위기와 감정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지금은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그의 말에는 개인의 선택과 국제 정세가 교차하는 지점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한국위 환율이 한국 여행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커 보였다. 올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들의 수가 역대 사상최고치를 달성했다는 소식은 환율의 영향이 일정 부분 차지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환율에 기대는 관광 성장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 환율은 언제든 반전될 수 있고, 원화 가치가 회복되면 지금의 가격 경쟁력은 빠르게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때 관광 콘텐츠와 서비스의 질, 여행 경험의 만족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은 다시 다른 국가로 향할 수 있다. 실제로 관광객 수는 늘었지만 지역별·업종별 체감 경기는 여전히 엇갈린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쇼핑과 특정 상권에 소비가 집중되고, 지방과 체험형 관광은 상대적으로 수혜가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록을 ‘성과이자 경고’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외국인 방문객 증가 자체는 분명 긍정적인 신호지만, 그 동력이 환율이라는 외부 변수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면 지속 가능성은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류 콘텐츠와 미식, 의료·뷰티, 자연과 도시 관광 등 한국이 가진 강점을 보다 정교하게 묶어내고, 가격이 아니라 경험과 품질로 선택받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원화 약세로 한국이 가성비 좋은 여행국으로 비춰지는 요즘, 이를 바라보는 일부 국민들 사이에선 다소 현실적인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유인즉,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 국가를 여행할 때 환율이 좋다는 이유로 여행지를 선택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해당 국가를 낮춰 보거나 소비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외국인 관광객 역시 원화 약세로 ‘싸진 한국’을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다.
관광 현장에서는 이러한 양면성이 동시에 관찰된다. 일부 외국인 관광객들은 가격 비교와 할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한국을 비용 대비 효율적인 여행지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한국을 문화와 역사보다는 소비 중심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환율을 계기로 방문했지만, 체류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복합성과 문화적 깊이에 주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단순히 ‘싼 나라’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지만, 도시의 밀도와 문화 콘텐츠, 일상적인 풍경을 경험하며 기대를 수정하는 관광객들도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환율이 관광 수요를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국가 이미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결국 여행 과정에서의 경험이라고 강조한다. 원화 약세가 한국 관광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이를 단기적 가격 경쟁력에 그치지 않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서울 명동의 한 환전소 앞에서 중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환율 현황을 바라보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 단기적인 방문객 수 확대를 넘어, 체류 기간과 재방문율을 높일 수 있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교통과 안내 인프라 개선, 언어 서비스 확대, 지역 특화 콘텐츠 육성 등은 환율과 무관하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요소로 꼽힌다. 관광객 증가가 지역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하는 구조적 고민도 요구된다.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외국인 방문객 수는 분명 한국 관광의 회복과 잠재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원화 가치 하락이라는 현실을 외면한 채 자축에만 머문다면, 성과는 일시적 숫자에 그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싸서 오는 한국’이 아니라 ‘와야 할 이유가 분명한 한국’을 만드는 전략이다. 이번 기록이 환율이 아닌 경쟁력으로 다시 쓰일 수 있을지, 한국 관광의 다음 과제가 되고 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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