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한 편의 시가 한 민족의 기억을 태우고 달린다.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 김블라디미르의 작품 〈회상열차 안에서–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경로를 따라서〉는 서정시이자 동시에 집단 기억의 증언문이다.

시인은 개인의 체험을 넘어,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라는 역사적 비극을 ‘열차’라는 상징적 장치에 실어 다시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

이 시를 쓴 이는 한때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문학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 의과대학 러시아어문학과 학과장으로 30여 년간 강단에 섰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광주 인근에서 공장 일과 농촌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사과와 배, 감을 따고, 배추와 무를 수확하는 현장이 그의 일터다. 학문과 노동, 지성과 육체를 모두 살아낸 그의 삶은 이 시가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삶의 증언으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블라디미르 시인/사진=고려인마을 제공

이 작품 속 열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통로이자, 침묵을 거부하는 윤리적 선언이다. 시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기억해야 할 책임을 현재의 독자에게 건넨다.

시의 정서는 반복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무엇 때문에? 이에 대한 답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주를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네.” 러시아어 원문에서도 같은 질문이 되풀이된다. 여기서 ‘왜?’라는 물음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답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고발한다. 이 질문의 공허함은 강제이주가 어떤 합리적 설명이나 정당성도 가질 수 없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설명 대신 질문을 반복함으로써, 국가폭력의 비이성과 잔혹함을 드러내는 언어를 구축한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시선은 창밖으로 향한다. “숲 속의 풀, 자작나무, 포플러…” 평온한 자연의 풍경은 곧 내면의 소리와 맞부딪힌다. “나는 부모님의 탄식소리를 듣네.” 자연은 무심히 흐르지만, 기억은 멈추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열차는 공간을 이동하지만, 시간은 오히려 과거로 되돌아간다.

현재의 풍경과 과거의 탄식 사이에서 시인은 증언자의 자리에 선다. 이는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이 반복해 온 핵심 구조, 곧 ‘현재에 살지만 과거를 떠날 수 없는 존재’를 절제된 언어로 구현한 대목이다.

시인은 조상들의 강제이주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낯선 곳으로 가슴 아프게 그냥 내던져졌다네.”‘내던져졌다’는 표현은 인간이 스스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폭력적으로 투척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시는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오, 근면과 의지의 우리 민족이여! 우리는 이것으로 명예와 존경을 얻었다네.” 이는 자기위안이 아니라, 피해의 역사 속에서도 존엄을 회복하려는 윤리적 선언이다. 시인은 강제이주가 민족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노동과 인내를 통해 새로운 존엄을 세워왔음을 단호하게 말한다.

작품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기억은 우즈베키스탄 민족에 대한 감사다. “그들은 형제처럼 우정의 손을 내밀었네.” 이 구절은 가해와 피해라는 단순한 구도를 넘어, 연대와 환대의 기억을 기록한다. 고려인 정체성이 상처의 기억만이 아니라, 타민족과의 윤리적 공존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장 깊은 울림은 부모 세대의 소망에서 전해진다. “단 한 번만이라도 조국 땅을 보는 것.” 그 소망은 웅대하지 않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조국은 더 이상 삶의 터전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에 한 번 바라보고 싶은 풍경으로 남았다. 이는 강제이주가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미래 자체를 박탈한 폭력이었음을 조용히 증언한다.

시의 끝에서 시인은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민족은 하나요, 분열되어서는 아니 되리라.” 결말은 애도가 아니라 윤리적 명령이다. “잊지 않으리라”는 선언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책임에 대한 다짐이다.

김블라디미르의 〈회상열차 안에서〉는 화려한 수사보다 절제된 언어로 한 세기의 고통을 견인한다. 이 열차는 과거를 싣고 달리지만, 목적지는 과거가 아니다. 기억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현재이며,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미래다. 따라서 이 기억의 열차는 오늘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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