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제목 : 나는 열강에서 태어났다
나는 열강에서 태어났다./그 이름은 바로 소비에트연방/ 네게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권한이 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소련사람으로 남는다
나는 학교도 소련학교를 다녔다./ 사랑스런 우즈베크 땅에서/ 비록 민족은 고려인이었지만/ 나는 러시아어로 책을 읽었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 나는 거대한 강대국의 학생이었다/ 러시아어의 억양으로/ 소련의 넓은 땅에서 이야기했다
헌데 한 순간에 나라가 무너졌지/ 그게 뉘게 이익이 되는 건지 모른 채로/ 갑자기 국경이라는 울타리가 생겨/ 이제는 비자를 받아야만 갈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타쉬켄트여, 그곳은 다 우리 것이었다/ 가슴아프게 정다운 그늘진 공원/ 그래, 너는 더 멋지고 아름다워졌지만/ 내 마음의 느낌으로는 이제 달라졌구나
광주 고려인마을 시인 김블라디미르/사진=고려인마을 제공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활동 중인 김 블라디미르 시인의 시 〈나는 열강에서 태어났다〉는 한 개인의 회고를 넘어, 한 세대가 겪은 붕괴와 상실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이 시는 고려인 디아스포라가 경험해 온 정체성의 형성과 해체,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장소상실로 인한 유랑민’의 현실을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전하고 있다.
시는 자부심에서 출발한다. ‘열강’에서 태어났다는 선언, 그리고 ‘소련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정체성은 한때 그의 삶을 지탱하던 분명한 좌표였다. 학교도, 언어도, 학문도,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도 모두 소비에트연방이라는 이름 아래 놓여 있었다. 민족은 고려인이었지만, 일상의 언어는 러시아어였고 삶의 질서는 소련 사회였다.
그러나 시의 중반부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다. “헌데 한 순간에 나라가 무너졌지.” 이 한 줄은 단순한 체제 변화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이 하루아침에 해체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지도 위에 새로 그어진 국경선은 정치적 경계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고향을 타국으로 만들었고, 자유롭게 오가던 땅을 ‘비자를 받아야만 갈 수 있는 장소’로 바꾸어 놓았다.
김 블라디미르 시인의 삶은 이 시의 연장선 위에 있다. 1956년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서 고려인 3세로 태어난 그는 한때 러시아문학 교수로 대학 강단에 섰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민족차별과 생활고가 심화되면서 그의 삶은 급격히 흔들렸다. 자녀들이 먼저 한국으로 귀환했고, 그는 가족을 따라 조상의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국’은 그를 온전히 맞이하지 않았다.
언어는 높은 장벽이었고, 학문은 더 이상 생계를 보장하지 못했다. 교수였던 그는 광주에서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에게서 국가는 다시 한 번 사라졌다. 이번에는 붕괴된 체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였다.
그럼에도 그는 시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어를 알지 못했기에 러시아어로 쓴 그의 시들은 오히려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기억과 감정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는 도구가 되었다.
2017년 발표한 첫 시집 『광주에 내린 첫눈』에는 낯선 땅에서 맞은 첫 겨울의 차가운 공기, 노동의 무게, 말 걸 곳 없는 외로움, 그리고 그럼에도 꺼지지 않았던 희망이 섬세하게 담겨 있다.
그가 한국에서 쓴 시 〈추석〉에는 이런 호소가 담겨 있다. “우리도 ‘이것이 내 조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해달라.” 역사적 조국 한국에서조차 여전히 ‘타자’로 불리는 현실은, 고려인들에게 장소상실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형의 상처임을 보여준다.
김 블라디미르의 시는 개인의 서사를 넘어 고려인 공동체 전체의 기억을 꿰어낸다. 연해주에서 쫓겨나 우슈또베의 황무지를 논밭으로 일군 선배 세대, 마음속에서만 고향을 되살리며 버텨온 후손들, 언어와 신분의 추락 속에서도 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오늘의 이주 시인들. 이 모든 삶은 ‘장소’와 ‘장소상실’이라는 키워드로 서로 깊게 연결돼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그의 시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그 시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유랑의 역사 속에서도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존엄과 기억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국경은 생겼지만, 그의 시 속에서 고려인의 삶은 여전히 국경을 넘어 서로를 향해 말을 건다.
그리고 오늘도 김 블라디미르 시인은 조용히 묻는다.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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