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에서 열리고 있는 ‘고려인 한글문학 기획전’이 강제이주의 한 세기가 남긴 아픔과 희망을 소설가이자 극작가 김기철(1907~1993)의 삶과 작품을 통해 다시 조명하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대표 작가인 김기철의 문학 세계를 중심으로, 강제이주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던 한글 문학과 연극의 명맥을 되돌아보는 자리다.
소설가이자 극작가 김기철(1907~1993)/사진=고려인마을 제공
김기철은 소련 시기 고려극장을 대표하는 고려인 극작가이자 연출가, 문화기획자로 활동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로 옮겨진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연극과 문학을 통해 언어·기억·정체성을 지키는 문화적 저항을 실천했다.
연해주에서 출발한 고려극장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이전하며 존립의 위기를 맞았으나, 김기철은 창작과 조직, 연출을 아우르며 극장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떠받쳤다. 무대는 고려인들이 자기 언어로 말하고 노래하며 울고 웃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공적 공간이었다.
러시아어가 공적 언어로 자리 잡은 환경 속에서도 김기철은 한국어(한글) 희곡과 산문 창작을 고집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기억, 유랑과 상실, 공동체의 윤리를 비극과 서정이 결합된 사실주의 문체로 형상화하며,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해 나갔다.
특히 김기철은 가장 수려하고 정제된 문체를 구사한 고려인 1세대 산문문학 작가로 평가된다. 연해주 거주 시절부터 희곡과 산문을 다수 집필했으며, 하바롭스크 변강출판사에서 포석 조명희와 함께 일하며 문학적 기반을 다졌다. 강제이주 이후에는 재소 고려인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 사할린 조선극장 극장장 등을 역임하며 문학·연극·언론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김기철의 이러한 문학적 성취는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로 공식 인정받았다. 지정된 23권 가운데 제12권은 김기철의 중편소설 ‘금각만’ (1982)이다. ‘금각만’은 우리나라 독립군들이 블라디보스토크 금각만 일대를 오가며 벌인 항일투쟁을 다룬 작품으로,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4월참변부터 1920년 10월 간도 경신참변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를 촘촘히 담아냈다.
작품에는 당시 신한촌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의 생활상, 영사관을 열고 밀정을 풀어놓은 일본 제국의 동향, 독립군과 일본 밀정 사이의 치열한 첩보전이 긴장감 있게 묘사돼 있다. '금각만'은 소설이자,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증언하는 문학적 사료로 평가된다.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로 등재된 또 다른 대표작 ‘붉은 별들이 보이던 때’ 는 전쟁 속에서 이어진 모성의 기록으로 1941년 6월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전쟁 직전 일곱 살 난 외아들 철수를 러시아 서부 벨로루시아로 휴양 보냈다가, 전쟁 발발로 아들과의 연락이 끊긴 어머니 순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이동이 가능해지자, 순희는 단 하나의 희망을 품고 아들을 찾아 나서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유려하면서도 현장감 넘치는 필치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모성의 빛과 인간의 존엄을 깊이 있게 담아냈다.
한편, 김기철은 문장으로 역사를 기록한 작가였다면, 고려극장 창립 멤버 김해운은 집단의 비극을 무대 위에 올린 기획자였고, 전업 극작가 한진은 망명 속에서도 현장을 지킨 극장의 장인이었다.
이 세 작가의 작업은 강제이주 이후에도 고려인 문학과 연극이 꺼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가 됐다.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은 “김기철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이번 기획전은 과거를 단순히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아스포라가 남긴 문화유산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작업”이라며 “잊혀질 뻔한 이름과 이야기를 다시 부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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