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2025년 12월호=김향란 칼럼니스트] 보라색을 떠올릴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먼저 스며든다. 붉은 욕망의 온기와 푸른 이성의 냉기가 맞닿는 어딘가에서, 보라색은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를 낸다. 색이란 본래 빛의 언어지만, 그중에서도 보라색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가장 은밀한 거울에 가깝다.
보라색의 역사는 오래된 피와 바다의 기록이다. 지중해의 뿔고둥 수만 마리에게서 겨우 한 방울 얻을 수 있었던 티리언 퍼플. 황제의 어깨에 걸렸던 그 색은 사실 희생의 색이었고, 동시에 욕망의 색이었다. 그 비싼 색을 얻기 위해 인간은 자연을 베어내고, 자연은 인간에게 권위의 허상을 내어주었다. 그래서일까. 보라색은 늘 절대권력의 문턱에 서서 스스로의 운명을 증명해온 색이다.
라벤나의 모자이크 속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외투는 그 색 하나만으로 신성함을 주장한다. ‘Born in the Purple.’ 보라색 방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 태생이 곧 운명이고, 출생이 곧 권력이었던 시대. 보라색은 그렇게 인간의 정치적 욕망을 꿰뚫어 보여주는 색이었다.
그러나 보라색은 이성적 권력과 육체적 욕망 사이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그 색은 종종 인간의 깊은 내면, 근원적인 결핍과 기대까지 비추곤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방을 채우던 보라색은 단지 부와 향락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색 위에서, 지성, 감각, 정치력, 아름다움의 네 가지 칼날을 세우고 세계의 권력을 가르는 새로운 퍼포먼스를 만든 사람이다. 진주를 녹여 마셨다는 전설 속의 장면조차, 사실은 ‘나는 이만큼의 세계를 다룰 수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었을지도 모른다.
보라색이 인간의 심리를 건드리는 방식은 이토록 복잡하다. 붉은 본능과 푸른 이성이 동시에 작동할 때, 우리의 마음은 경계와 균형을 요구한다. 욕망과 통제가 한순간에 맞물리는 그 지점에 퍼플의 본질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복합적인 색은 또 한 번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19세기, 우연한 실험에서 태어난 모브 색은 보라색을 대중의 일상으로 데려왔다. 황제의 색이던 보라가 산업의 색이 되었을 때, 색은 더 이상 출생의 상징이 아니라 창의성의 징표가 되었다. 누군가의 허락이 아닌, 누군가의 ‘시도’가 색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세스 고딘이 말한 “보라색 소”는 결국 이 시대의 보라색 권력을 대변한다. 뾰족한 생각, 독창적 시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관점 등 오늘의 퍼플은 이러한 새로운 권위에 부여된다. 현대카드의 ‘더 퍼플’이 타인에게 과시하는 카드가 아니라 ‘취향의 무게’를 말하는 기호가 된 것처럼, 보라색은 이제 개인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색이 되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BTS의 “보라해(I PURPLE YOU)”는 보라색이 연대를 확장하는 색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이상 소수가 독점하는 권력이 아니라, 다수가 서로를 지키는 약속의 색. 신뢰와 지속, 연결의 힘이 담긴 새로운 보라.
색의 역사는 언제나 권력의 역사였지만, 보라색은 유독 인간의 내면을 훤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욕망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권력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설계한다. 그 둘이 부딪히고 포개지는 순간, 보라색은 삶의 또 다른 층위를 열어준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과거의 보라색이 태생의 색이었다면, 오늘의 보라색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아마 그 답은 오래된 황제들의 대리석 방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시선,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우리가 감당하려는 욕망과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보라색을 만든다.
보라색은 이제 완성된 색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색이다.
그리고 그 색을 결정하는 힘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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