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2025년 12월호=김지아 칼럼니스트] 색과 디저트의 교차점에서 읽는 한국의 미감
곧 동지가 다가온다. 예로부터 동지는 ‘작은 설’이라 불렸다.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어둠이 극에 이르는 음의 순간, 사람들은 팥죽을 쑤어 서로 나누며 액운을 막고 새해의 길운을 불러들였다. 팥의 붉은 색은 단순한 식재료의 색이 아니라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보호의 색이었다. 한국 음식 문화는 이처럼 색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과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오방색(五方色)이 있다. 청(靑),적(赤), 황(黃),백(白),흑(黑). 동서남북과 중앙, 그리고 목·화·토·금·수의 오행을 상징하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철학적 체계를 담고 있다.
최근 한식 디저트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모양만 예쁜 디저트가 아니라 색과 의미, 미학(美學)과 이야기를 함께 맛보는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오방색의 철학이 현대의 한식 디저트와 만나서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청(靑)-생명의 기운
청(靑)은 봄과 동쪽, 생명의 시작을 상징한다. 말차와 쑥의 ‘녹색의 농담(濃淡)’은 새싹의 기운을 담아내며 현대디저트에서 생명력과 회복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특히 쑥은 정화와 치유의 상징으로 전통재료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청(靑)은 단순히 녹색이라는 색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과 회복, 순환의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재료적 상징이다.

적(赤)-보호와 열의 색
적색은 인간의 생명과 가까운 색이다. 피와 심장의 색, 체온과 열의 색이며 동시에 불과 태양, 에너지의 색이다. 한국 전통에서 붉은색은 액막이의 힘을 가진 색이었으며 혼례의 활옷, 출산 후 금줄의 빨간고추와 빨간실 ,동지의 팥죽까지, 생명과 공동체를 지키는 의식 속에 존재했다. 한식디저트에서 청이 새싹의 기운이라면 적은 완성된 열매의 기운이다. 겨울의 가장 깊은 지점에서 팥죽을 나누는 행위 또한 가장 차가운 계절 속에서 가장 뜨거운 색으로 서로를 지키는 의식이다.

황(黃)-중심과 조화, 풍요의 색
황색은 오행에서 토(土)의 기운, 중심과 안정의 색이다. 동양철학에서는 만물의 중심과 균형을 잡아주는 존재로 설명한다. 곡식과 꿀, 밤, 고구마, 단호박처럼 땅에서 자란 재료들은 생존의 기반이 되어왔으며, 달콤함을 넘어 ‘돌아갈 곳’이라는 심리적 평온을 준다. 밤양갱과 율란, 꿀약과 같은 절제된 단맛의 디저트는 포근함과 휴식을 전한다. 황색의 디저트에는 화려함보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는 시간에 더 어울린다. 안정감이 필요한 순간 우리가 본능적으로 찾는 것은 화려한 맛이 아니라 편안함의 맛이다. 그래서 황색은 결국 ‘안녕’의 색, 몸과 마음의 중심을 회복시키는 색이다.

백(白)-정결과 시작의 색
백색은 동양철학에서 금(金)의 기운,비움과 시작을 상징한다. 모든 색을 품는 여백의 색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게 한다. 아이의 첫 생일에 올리는 백설기나 왕이 생일상에 올리던 두텁떡처럼 의례와 축복의 순간에 백색 음식이 놓인 이유는 정결과 기원의 의미 때문이다. 이처럼 백색의 맛은 화려함을 덜어내고 재료의 결을 드러냄으로써 기교와 과한 단맛이 남기는 피로 대신 밀도와 절제, 본질의 힘으로 입안에 오래 머무는 고요와 균형을 선물하는 색이다.

흑(黑)-깊음과 사유의 색
백색이 비움과 시작의 색이라면, 흑색은 물(水)의 기운과 연결되며, 생명을 보호하고, 생각을 가라앉히며, 내면의 성찰을 돕는다. 백색이 시작의 용기라면 흑색은 그 시작 이후의 시간과 경험을 단단하게 정리하고 깊이를 부여하는 색이다. 흑색 디저트는 대부분 단단함, 묵직함, 은은한 단맛을 가진다. 구수한 향과 묵직한 질감으로 시간을 품은 맛의 흑미떡, 고소한 흑임자의 풍미가 입안에서 퍼지며 내면을 단단하게 지탱한 맛을 주는 흑임자다식과 흑임자 경단 등의 흑색 디저트는 맛의 밀도와 색의 깊이로 백색 디저트가 남긴 ‘비움과 시작’을 한 단계 더 성숙하게 완성한다. 흑(黑)은 침잠(沈潛)과 사유(思惟)의 미학을 통해 맛의 성숙을 이끈다.

오방색과 디저트, 삶의 기운을 입안에서 느낀다
오방색은 단순한 다섯가지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감각과 정서를 기록하는 철학적 언어다. 청색이 생명의 기운을, 적색이 열정과 보호의 마음을, 황색이 중심과 풍요를 ,백색이 비움과 시작을 , 흑색이 숙성과 사유를 담듯 색은 우리 내면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한식 디저트를 맛보는 순간, 우리는 색과 맛, 질감과 향, 그리고 시간의 흐름까지 동시에 경험한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의 층위는 곧 삶의 기운도 맞닿는다. 한 조각의 떡이나 약과가 전하는 색과 재료는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인간과 자연을 이야기한다. 결국, 오방색 디저트를 마주하는 경험은 단순한 음식 소비가 아니라 몸과 마음, 감각과 감정이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색을 통해 기운을 읽고, 맛을 통해 마음을 위로하며, 오늘과 내일을 이어가는 작은 의식을 경험한다. 오방색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인생의 기운을 입안에서 느끼게 하는 삶의 언어다. “오늘 나는 어떤 색을 먹고, 어떤 마음을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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