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삶의 대명제다. 정해진 성공의 방정식을 풀어내느라 오늘도 해야 할 일에만 매달리며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떻게 재미있게 살 것인가?’라고 질문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을 가지고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산다면 가능하다. 또한 좋아하는 재미를 즐기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더 재밌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일상 곳곳에 있으니 함께 누려보자.

빨갛게 버무린 양념을 듬뿍 바르는 김치 담그는 모습


[시사의창 2025년 12월호=서병철 작가] 일년은 365일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다. 사람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소비된다. 즐거움, 행복감, 괴로움, 번민, 고뇌, 스트레스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다. ‘한 해에 즐거운 날이 단 하루 24시간 만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보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다. 즐거운 날은 뭐니 뭐니 해도 내 생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릴 때는 그랬지만 나이가 들수록 무감각해진다. 아니, 자신은 몰랐는데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에게는 생일보다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하루가 있다. 바로 김장하는 날이다.

한국 음식은 발효 식품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다. 콩을 발효한 장, 채소를 발표한 김치, 생선을 발효한 젓갈, 곡물을 발효한 술 등 그중 으뜸은 김치다. 과연 한국에서 김치는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김치의 역사는 예상보다 매우 길다. 삼국시대 이전에 단순한 소금에 절인 채소에서 출발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마늘과 젓갈을 넣은 형태로 발전하면서 오늘날 김치의 원형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김치 역사의 가장 큰 변화는 고추가 한국에 유입되면서 조선 후기 고추가 양념으로 추가되고 통이 크고 속이 꽉 찬 결구배추가 주재료로 사용되면서 오늘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발효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관세청 무역통계(2023년)에 의하면, 한국 김치 수출은 93개국을 넘어서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김치 수출액 비중이 40%로 가장 높은 일본을 포함한 기존 아시아 시장을 넘어 수출액 비중이 26%까지 급성장한 미국을 비롯해 네덜란드, 영국을 포함한 유럽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글로벌 K-푸드의 중심이 틀림없다. 이는 김치가 발효 음식이다 보니 면역력을 증진하는 건강식, 비건(Vegan) 음식으로 인식되고, K-음악, K-드라마, K-영화 등의 열풍을 타고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김치 열풍이 불고 있는데 요즘 한국의 김치 현실은 어떨까? 식생활의 변화로 인해 가족들이 김치를 잘 먹지 않아서 아예 김장하지 않는 가구도 늘고 있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주변 이웃과 친분도 없어지거나 친척과의 만남도 뜸해졌다. 이에 함께해야 하는 김치 담그기는 엄두도 내지 못해 마트에서 구매하는 가정도 많다. 향후 집에서 김장하는 모습도 서서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시골에서 김장은 동네 큰 행사 중 하나였다. 백 포기 넘는 배추김치를 담그는데 동네 아주머니들 예닐곱 명이 자발적으로 우리 집으로 왔던 기억이 있다. 이웃집 김장을 도와주는 품앗이다. 아주머니들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도 자기 집 김치인 양 정성을 가득 담았다. 빨갛게 버무린 양념을 듬뿍 머금은 먹음직스러운 김치는 땅을 파고 묻은 항아리에 하나씩 쌓이고 숙성에 들어가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김장 후 저녁만찬


드디어 오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김장하는 날이다. 내 주요 역할은 힘을 쓰는 허드렛일이다. 대형 무와 알타리를 씻는 일이 첫 번째다. 처음에는 허리가 아프고 힘들었는데 경험이 축적되다 보니 요령이 생겨서 올해는 손쉽고 깔끔한 해법도 찾았다. 스스로 비결을 찾았다는 것에 피식 웃음도 나왔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작업이 매우 힘든데, 소금에 절인 배추를 직접 살 수 있기에 과거 대비 훨씬 수월해졌다. 절인 배추 물기를 빼기 위해 배추를 한 단씩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깨끗하게 씻은 무를 반 토막 자른 후 무채를 써는 것은 남자들의 주된 일이다.

“이렇게 약하게 밀면 안 돼요.”

큰 처형이 말했다.
힘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무의 굵기가 약간 흐물흐물해져서 원하는 형태가 안 된 것이다. 매년 빠지지 않고 와서 도움 주시던 큰 동서의 건강이 안 좋아진 탓이다. ‘작년까지 괜찮으셨는데’ 나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김장은 진두지휘하는 총사령관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바로 큰 처형이다.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양념을 만드는 것이다. 늘 큰 처형의 몫이다. 바로 여기서 김장의 맛이 가장 크게 좌우한다. 무게를 재는 것이 아닌 눈썰미로 양을 가늠하는 모습이 카리스마가 있다. 계량하지 않고 큰 처형의 그만이라는 신호가 나올 때까지 쏟아붓는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오는 적절한 시점에서 ‘그만!’이라는 말이 사령관의 명령보다 준엄하다. 배추에 양념을 묻히는 작업을 이번엔 둘째 딸도 거드는 모습도 보기 좋다. 배추 한 잎을 뜯어서 양념을 묻혀서 먹어도 맛나지만, 잘 삶은 돼지고기 수육, 생굴과 함께하니 최고의 별미다. 조카가 가져온 몰트위스키와도 근사하게 잘 어울린다.

김장 문화는 2013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핵심 이유는 가족과 이웃이 함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나눔·연대·정체성 강화의 사회적 가치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김장하는 행위는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한다. 끝나고 나면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한 탓에 뻐근하고 쑤시기도 한다. 고통은 잠시 일 년 내내 맛있는 음식인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또한 김장이라는 품앗이 문화를 통해서 함께 한 친척 혹은 지인과의 관계도 더 돈독하고 끈끈하게 만든다. 김장은 함께 만든 사람과 친척과 나누며 두터운 정을 이어간다.

순간이 모여 하나씩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순간은 오랫동안 잡고 싶지만 다가오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붙잡을 수 없다. 불행한 순간은 왜 그토록 길게 머무는지. 즐거움의 한순간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 즐거운 순간의 시간을 늘리거나 빈도수가 많아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순간을 즐긴다는 것이 바로 행복의 열쇠다. 매끼 밥상에 올라갈 맛난 김치를 함께 만드는 순간,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올해 김치 맛도 기가 막힌다. 앞으로 일 년, 김치를 먹을 때마다 미소가 절로 나올 것이다. 미소를 짓다 보면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김장 날이 다시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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