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U 하면 대부분 게이밍 컴퓨터를 떠올린다. 고사양 게임을 부드럽게 돌리기 위해 PC방이나 게이머들이 수십만 원씩 주고 사는 그래픽 카드 말이다. 그런데 이 GPU가 지금 전 세계 국가들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전략 자원이 되었다.
한국이 확보한 26만 장. 이 숫자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일본이 확보한 3만 장의 8배다. GDP 세계 3위 일본이 간신히 확보한 물량의 8배를 한국이 가져온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각각 1~2만 장 수준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한국은 그들을 합친 것보다 10배 이상 많은 물량을 손에 넣었다.
더 놀라운 것은 당초 목표였던 5만 장조차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고개를 저었다. “글로벌 공급 부족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한국이 5만 장? 꿈 깨라.”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26만 장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왜 전 세계가 GPU 확보에 목을 매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게임용 그래픽 카드가 어떻게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전략 자원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10월 31일 APEC 정상회의장인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접견에 앞서 국내 기업 대표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2월호=김세전 전략사업부 대표] 인프라가 만든 대한민국, 26만장 GPU의 의미
산업화의 핵심 인프라를 꼽으라면 단연 경부고속도로다. 1970년 완공 당시 전국 자동차 등록 대수는 10만 대 수준이었고, ‘4차선 고속도로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회의론이 만연했다. 하지만 결과는 명확했다. 물류비용이 급감하면서 산업화가 가속화되었고, 고속도로는 한국 제조업의 대동맥이 되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의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도 마찬가지였다. 문자메시지로 충분하다는 비판 속에서도 전국에 광케이블을 깔았고, 그 결과 네이버, 카카오 같은 IT 기업들이 탄생했다. 통신비용이 사실상 제로가 되면서 디지털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25년 이재명 정부와 삼성·SK·현대 등 주요 재벌의 전략적 협력이 결실을 맺었다. 엔비디아로부터 26만 장의 GPU 공급 계약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는 정부의 외교력과 재계의 기술력, 협상력이 결합된 총력전의 성과물이었다. 고속도로가 물류비용을, 인터넷망이 통신비용을 낮췄다면, GPU는 ‘지능 비용’을 낮춘다. AI를 활용한 계산과 학습이 대중화되는 시대가 열린다는 의미다.
GPU, AI 시대의 핵심 자원
GPU(Graphics Processing Unit)는 본래 게임 그래픽 처리를 위해 개발되었다. CPU가 복잡한 연산을 순차적으로 처리한다면, GPU는 단순한 연산을 대량으로 병렬 처리한다.
이 특성이 AI 학습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엔비디아는 GPU를 AI 가속기로 재설계했고,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26만 장의 GPU가 가동되려면 원자력 발전소 1기 분량의 전력이 필요하다. GPU 1장당 약 700W의 전력을 소비하는데, 여기에 냉각 시스템까지 포함하면 소비전력은 두 배로 증가한다. 단순 계산으로 26만 장은 약 3.6억kWh의 연간 전력을 필요로 한다.
이 GPU들은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AI 팩토리’를 구성한다. 챗GPT 같은 언어모델부터 자율주행, 로봇 제어까지, AI의 ‘두뇌’를 만드는 핵심 설비다. 전문가들은 GPU 확보가 향후 10년 AI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전망한다.
글로벌 GPU 쟁탈전…한국의 역습
현재 GPU는 전 세계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전략 자원 중 하나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는 단일 기업으로 100만 장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구글과 아마존도 대규모 물량을 확보했다. 메타는 최근 35만 장 추가 확보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로 사실상 시장에서 배제되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시작된 최신 GPU의 중국 수출 차단은 바이든 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었다.
일본은 2024년 약 3만 장을 확보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1~2만 장 수준에 그쳤다. 대만은 TSMC가 있지만 자국 AI 산업 발전을 위한 GPU 확보는 5만 장 선이다. 2024년까지 한국의 GPU 보유량도 약 2만 장 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26만 장 확보는 충격적인 결과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재명정부가 당초 약속한 5만 장 확보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공급 부족 상황에서 후발주자인 한국이 대규모 물량을 확보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당초 목표의 5배를 초과했다. 한국은 단숨에 미국,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 최대 규모의 GPU 보유국이 되었다. 일본의 8배, 대만의 5배에 달하는 물량이다. 한국은 단일 거래로 글로벌 AI 인프라 경쟁에서 3위권 국가로 부상했다.
지난 10월 30일 서울 강남 코엑스광장에서 열린 지포스(GeForce) 한국 25주년 기념행사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좌측부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5만 장에서 26만 장으로…정·재계 합동 외교전
26만 장 확보는 정부와 재계가 하나의 팀으로 움직인 결과다. 이재명 정부는 단순 구매가 아닌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으로 접근했다. 청와대 주도로 산업부, 과기정통부, 외교부가 합동 협상단을 구성했고, 삼성·SK·현대 등 주요 기업이 각자의 강점을 활용한 패키지 제안을 내놓았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협력 카드를 제시했다. 현재 엔비디아 GPU는 대만 TSMC가 독점 생산 중인데, 삼성의 파운드리 기술은 TSMC와 경쟁 가능한 세계 유일의 대안이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공급망 다변화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 곳에 의존하는 것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또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HBM(High Bandwidth Memory)이다. HBM은 GPU에 필수적인 고속 메모리로, AI 연산에 필요한 막대한 데이터를 저장하고 빠르게 공급하는 초대형 창고 역할을 한다.
SK하이닉스는 이 시장의 약 50%를 점유하고 있으며, 엔비디아의 최신 GPU에 들어가는 HBM3 물량의 대부분을 공급한다. 삼성전자도 뒤늦게 시장에 진입했지만, SK하이닉스의 기술력과 생산능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현대차그룹은 피지컬 AI 실증 파트너십을 제안했다. 자율주행 기술과 최근 인수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봇 기술을 보유한 현대차는 엔비디아가 추구하는 ‘피지컬 AI’ 전략의 최적 파트너였다.
협상 과정은 치밀했다. 정부는 AI 특구 지정, 규제 완화, R&D 지원 등 제도적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재계는 대규모 투자 계획과 함께 엔비디아의 차세대 기술 개발에 필요한 협력 방안을 구체화했다. 10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이 거래에서, 한국은 단순 구매자가 아니라 엔비디아의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젠슨 황의 방한과 삼성동 치킨집 방문은 이 협상의 최종 단계를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더 주목할 점은 엔비디아 공식 홈페이지에 한국 홍보 영상이 게재되었다는 사실이다. GPU 판매사가 구매국을 홍보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한국이 엔비디아에게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차세대 AI 전략의 성공을 증명할 ‘쇼케이스’임을 의미한다.
엔비디아 유투브 채널에 실린 한국 헌정 영상. 이 영상에서 젠슨황은 ‘기적이 계속되는 나라’로 한국을 소개했다. [엔비이다 유튜브 채널 화면 갈무리]
피지컬 AI, 엔비디아가 한국 택한 이유 중 하나
젠슨 황이 한국에 26만 장이라는 파격적 물량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피지컬 AI’ 전략이 있다. 챗GPT로 대표되는 언어모델이 AI의 ‘두뇌’라면, 피지컬 AI는 AI에 ‘몸’을 부여하는 것이다. 자율주행차, 공장 자동화 로봇, 휴머노이드가 모두 피지컬 AI의 범주에 속한다.
피지컬 AI 구현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제조 역량이다. AI를 탑재할 물리적 기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학습 데이터다. 실제 환경에서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가 있어야 AI가 학습할 수 있다.
셋째, 고급 인력이다. AI 모델을 설계하고 최적화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필요하다.
한국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췄다. 현대차는 자동차 생산과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통한 로봇 제조 능력을 보유했다. 삼성·LG는 가전, 스마트폰 등 다양한 스마트 기기를 생산한다.
제조업 강국으로서 축적한 생산 데이터, 품질 데이터, 소비자 데이터도 상당하다. KAIST, 서울대 등에서 배출되는 AI 인재들의 수준도 세계적이다.
반면 중국은 제조 역량은 압도적이지만 GPU 확보가 불가능하다. 미국의 수출 규제로 최신 GPU를 한 장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과 유럽은 제조 역량은 있지만 IT 생태계와 데이터 축적, 그리고 빠른 의사결정 면에서 한국에 뒤진다.
엔비디아는 피지컬 AI 시대의 '인텔'이 되고자 한다. PC 시대에 윈도우와 인텔이 운영체제와 반도체로 시장을 지배했듯이, 피지컬 AI 시대에는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와 칩이 표준이 되길 원한다. 그리고 그 성공을 증명할 첫 번째 국가로 한국을 선택한 셈이다.
AI 주권 확보, 10년을 결정할 분기점
AI 전문가들은 향후 5~10년이 국가 간 AI 격차가 결정되는 시기라고 본다. GPU를 확보한 국가는 자체 AI 모델을 개발하고, 인재를 유지하며,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확보하지 못한 국가는 미국이나 중국의 AI 플랫폼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26만 장의 GPU는 한국이 AI 주도권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남의 AI를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한국형 AI 모델을 개발하고, 한국 기업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가 AI 엔지니어 1명에게 연봉 1,300억원(약 1억달러)을 제시한 것은 AI 인재 쟁탈전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인재란 복잡한 문제를 대규모 연산으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얼굴 데이터 1억 개를 분석하면 암 조기 진단 패턴을 찾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수학적 모델로 설계해 실제로 구현하는 능력이다.
그동안 한국의 AI 인재들은 GPU 부족으로 해외로 유출되었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최신 GPU 클러스터를 보유하고 있어, 연구자들이 원하는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다. 반면 한국 대학과 연구소는 GPU 부족으로 제한적인 연구만 가능했다.
26만 장의 GPU가 도입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대학은 최신 AI 연구를 수행할 수 있고, 정부 출연연구소는 한국형 초거대 AI 모델 개발에 나설 수 있으며, 스타트업들도 자체 AI 모델을 실험할 인프라를 확보하게 된다.
새로운 판교의 탄생
2000년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이후 판교 테크노밸리가 형성되고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이 탄생했다. 당시 누가 네이버가 시가총액 50조원 기업이 될 것이라 예상했겠는가. 카카오톡이 국민 메신저가 될 것이라 상상했겠는가.
AI 인프라 구축은 제2의 판교를 만들 수 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AI 기업들이 10년 후 코스닥을 이끄는 대표 기업이 될 것이다. AI 모델 개발 기업, 피지컬 AI 솔루션 기업, AI 반도체 설계 기업, AI 보안 기업 등이 향후 10년간 대거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는 ‘26만 장을 받았는데 이걸로 뭘 해야 하지?’라고 고민 중이라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기회다. 아무도 정답을 모를 때, 시도하고 실험하는 자가 미래를 선점한다.
2000년 인터넷망이 깔렸을 때도 대부분의 기업은 활용 방안을 몰랐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 네이버와 카카오가 탄생했다.
이번 GPU 확보가 한국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시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인프라가 생겼다. 이것이 혁신 생태계의 출발점이다.
IT강국의 초석을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김대중 대통령. 사진은 초고속 정보통신망 개통식 [출처_한국정책방송원 정부기록사진집]
넘어야 할 산, 전력 문제
GPU 26만 장 가동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원자력 발전소 1기가 연간 생산하는 전력이 약 90억kWh인데, 이 정도 규모의 전력 공급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미국 오픈AI는 2030년까지 10GW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원자력 발전소 10기 분량이다. 하지만 원전 건설에는 최소 5년이 소요되므로, 미국은 LNG 발전, 수소 발전, 재생에너지 등 다각적인 전력 확보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한국도 유사한 과제에 직면했다. 전력 생산은 주로 남부(영광, 울진, 고리 등)에서 이루어지고, 소비는 수도권과 산업단지에 집중되어 있다.
데이터센터 입지 선정과 송전망 구축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다만 이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에도 막대한 예산 투입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다.
인터넷망 구축도 마찬가지였다. AI 인프라 투자 역시 향후 10년 국가 경쟁력을 결정할 핵심 요소다.
전력 문제 해결 과정에서 또 다른 산업이 성장하게 될 것이다. 데이터센터 건설, 냉각 시스템, 송전 설비, 신재생에너지 등 관련 산업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문제는 곧 기회다.
역사에 기록될 2025년
고속도로가 물류비를 낮췄고, 인터넷망이 통신비를 낮췄다면, GPU는 지능 비용을 낮춘다. 이는 AI 활용의 대중화를 의미한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스타트업도 AI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번 GPU 확보는 이재명 정부의 외교력과 삼성·SK·현대로 대표되는 한국 재계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정부와 민간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여 당초 목표치의 5배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구매 계약을 넘어선 전략적 성과다.
26만 장의 GPU는 시작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인프라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정부는 규제 혁신과 R&D 투자를 통해 생태계 조성에 나서야 한다.
기업은 과감한 투자와 실험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 대학과 연구소는 세계적 수준의 AI 연구를 수행하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역사는 이 인프라 투자의 시점을 기억할 것이다. 1970년의 경부고속도로는 산업화 시대를 열었고, 2000년의 초고속 인터넷망은 디지털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2025년의 GPU의 확보는 AI 시대를 여는 문이 될 것이다.
10년 후 우리는 이 시점을 이렇게 회고할 것이다. “그때가 전환점이었다. 대한민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한 순간이었다고, 경부고속도로와 초고속 인터넷망에 이은 세 번째 도약이었다”고...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 갈 책무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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