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유례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재명 대통령과 삼성, SK, 현대차, LG, 롯데 등 국내 주요 기업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향후 5년간 1,301조 원 규모의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경제를 지배했던 ‘기업 자율’과 자유 무역’의 기조가 2020년대 들어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펜데믹과 지정학적 갈등이 상시화 되면서, 시장의 자유적 효율성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초국가적 리스크가 현실이 되고 있다.

11월 16일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를 위해 모인 이재명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2월호=김세전 전략사업부 대표]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통한 자국 중심 전기차 공급망 구축과 EU의 CRMA(핵심 원자재법)는 단순한 무역 정책이 아닌 ‘경제 안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명확한 신호탄이었고.
이번 대규모 투자 선언은 한미 관세협상이라는 거대한 변곡점 뒤에 숨겨진,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미래를 다시 짜는 ‘정부·기업의 공동 설계도’이다.
이는 과거의 산업화시대의 계획 경제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움직임이다.
국가 경쟁력과 생존을 위해 정부가 전략적 외교적 판을 깔고, 기업이 투자와 고용으로 화답하는 전략적 정부 주도 경제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고 있고,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외교의 시대, 기업 생존 공식 변화
한미 양국은 조인트 팩트시트를 확정했고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투자를 약속했다. 자동차 관세는 25%에서 15%로 낮아지고 조선·반도체·의약품 등의 232조 관세도 재조정됐다.
글로벌 시장의 무관세의 문은 닫히고 외교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이제 기업은 정부의 전략적 협상과 외교적 지원 없이는 시장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국가의 외교적 ‘희생과 부담’이 특정 기업의 수조 원대 영업이익으로 연결된다면, 그 기업은 당연히 그 대가로 국가적 목표(고용, GDP 기여, 지역 활성화)에 기여해야 하는 민관 협력의 새로운 규범이 형성된 것이다.
정부는 대규모 투자 환경을 조성하고 전략적 리스크를 관리하며, 기업은 투자와 고용으로 GDP 성장률을 높이고, 지역 경제의 활성화라는 공공적 목표를 달성하는 상호 의무 관계가 구축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머리를 맞댄 재계총수들과 이재명 대통령 ©연합뉴스


1,300조 투자, 국가의 이니셔티브가 필수
AI, 반도체, 수소 등 미래 산업은 기업의 단독 역량을 넘어서는 천문학적 투자금과 초장기적인 연구개발, 초기 시장 위험을 수반한다.
EUV 노광 장비 확보, 대규모 AI 데이터 센터 구축, 수소 생산 인프라 조성 등은 수십에서 수백 조 원 투자를 요구하는 초거대 프로젝트이다. 특히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에 필수적인 용수와 전력 인프라는 기업의 힘만으로는 절대 해결 불가능하다.
정부가 AI 글로벌 3강 육성 등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세제 혜택 및 규제 완화를 통해 ‘마중물’ 역할을 해야 기업들이 자본을 투입할 수 있다.
이번 1,300조 원 투자는 정부의 전략적 의지에 기업들이 동조하여 자본을 움직인, 전략적 유도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전남에 ‘AI-에너지 클러스터’ 앵커 포인트 띄운다
전략적 정부 주도 경제는 중앙 집중적 성장을 넘어 국토의 균형 발전이라는 숙원 과제까지 해결하는 포석이 될 수 있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와 SK가 합작으로 전남 서남권에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기로 했는데 투자 규모만 수십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 오픈AI와 SK텔레콤은 서남권 AI 데이터센터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전남도는 그동안 선제적으로 재생에너지 기반 에너지 대전환, 글로벌 데이터센터 클러스터 구축 등 비전을 세우며 준비해 왔다.
전력 소모가 큰 SK의 AI 데이터 센터가 신재생 에너지가 풍부한 전남에 배치되는 것은 에너지·첨단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앵커 포인트(Anchor Point)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도 서남권에 1GW(기가와트)급 대규모 수전해 플랜트를 건설해 물을 분해하여 친환경적인 그린 수소를 직접 생산하기로 했다.
이는 수소 생산부터 출하·충전으로 이어지는 수소 밸류체인을 구축하는 전략의 일환이 될 것이다.
정부의 전략적 유도와 대기업 투자가 결합해 기반이 약해서 투자가 없고, 투자가 없어서 기반이 약한 전남 지역의 악순환을 끊고, 균형 발전이라는 국가적 목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투자가 갖는 또 다른 핵심 의미는 고용의 질적 성장이다.
대기업들이 명시한 17만 명 규모의 채용 계획은 단순히 고용률을 높이는 것을 넘어, 40대 경제 허리와 청년층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정부가 투자 환경 조성을 통해 기업의 자본을 유도하고, 그 자본이 첨단 산업의 정규직 고용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시장 기능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재명 정부 에너지 고속도로 조성 계획


‘순유출’ 끊고 잠재 성장률 반등의 청사진 켠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협은 잠재 성장률의 급락이었다. 지난 수년간 노동, 혁신, 자본(설비 투자) 중 자본 투자의 순유출이 심각하여 잠재 성장률을 갉아먹었다. 이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절망적 메시지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 주요 기업들이 1,055조 원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으며, 문재인 정부 때에도 300조 원 규모의 투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1,300조 원 규모의 대규모 국내 투자는 이 추세를 완전히 반전시킨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총 투자규모는 직전 5년(2021~2025년) 국내 투자액 89조 원을 36조 원 이상 상회하는 사상 최대 규모다. 연평균 투자액은 25조 원으로, 직전 5년 연평균 17조8천억 원 대비 40%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국가 경제의 생산 능력 자체를 상승시키며, 단순히 단기적 경기 부양 효과를 넘어 잠재 성장률을 반등시킬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는 경제 주체의 심리적 활력까지 회복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보스턴 다이나믹스를 품고 로봇파운드리 구상에 나선 현대자동차그룹 ©연합뉴스


현대차 ‘로봇 파운드리’ 등 新비즈니스 모델 제시
정부 전략적 지원 아래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에 대응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피지컬 AI를 활용해 확보한 고객 맞춤형 로봇 기술을 바탕으로 로봇 완성품 제조 및 파운드리 공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사업 영역을 자체 로봇 제품 생산은 물론 제조 노하우가 부족한 중소기업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로까지 확장된다.
반도체에 국한돼 설계와 제작을 구분된 파운드리를 로봇에도 접목한다는 발상인데, 이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다.
이는 대규모 양산 설비가 부족한 혁신 기업들에게 생태계 기회를 제공하며, AI 및 피지컬 섹터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새로운 협력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차그룹은 AI 모델 학습 및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고전력 AI 데이터센터 건립을 추진하며, 이 데이터센터는 페타바이트급 데이터 저장소로 구성될 예정이다.

한반도를 둘러산 지정학 위기


중국의 추격 막고 초격차를 이루어야
한국 경제는 지금 중국의 거센 추격(2030년 10대 주력 업종 추월 전망)이라는 위기와 지정학적 리스크 심화라는 이중고에 직면해 있다.
이대로 ‘기업 자율’이라는 과거의 틀에 갇혀 있다면 위기는 현실화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점에 ‘전략적 정부 주도 경제’의 부활은 이 모든 흐름을 바꿀 터닝 포인트를 제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IRA 등 글로벌 무역 규칙의 변화 속에서 중국 배터리가 미국 ESS(에너지 저장 장치)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틈을 한국 기업이 LFP(인산철) 배터리 생산 전환으로 신속히 파고드는 것처럼, 이번 정부의 외교적 성과는 기업의 구체적인 시장 확대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민관 합심이 생존의 전략이자 위기의 타개책이 될 수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국내 투자 축소는 없다. 청년 일자리와 중소기업 상생까지 모두 챙기겠다”고 말했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와 혁신으로 대한민국 경제 활력을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전략적 정부 주도 경제의 부활은 과거에 실패했던 계획 경제로의 퇴행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시장 실패 영역을 보완하고,변수에 대응하며 정재계가 합심하여 지정학적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며, 초거대 규모의 투자를 유도하여 잠재 성장력을 극대화하는 유능한 국가 전략이 되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잠재 성장률 반등, 양질의 고용,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공동체의 목표를 공유하고 막대한 자본을 동원해 움직이는 것은 시장의 자율적 기능만으로는 불가능한 국가적 초격차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을사년의 역사적 맥락과 비교되기보다는 미래 세대의 산업·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정재계의 투자형 동맹 모델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이번 정부와 재계의 동맹은 한국이 치열한 글로벌 패권 경쟁 속에서 생존하고, 생존을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초격차를 확보하는 새로운 50년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신호탄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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