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몰락은 전쟁이나 경제 위기처럼 거대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진동은 훨씬 먼저, 훨씬 조용히 찾아온다. 과거 그 징후를 우리는 언어의 타락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조롱이 합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혐오가 비판으로 둔갑하고, 근거 없는 선동이 사실의 경계를 흐릴 때, 그 사회는 이미 균열을 품고 흔들리고 말 것이다. 바이마르 말기의 독일이 그랬고, 해방 후 한국사회가 그랬으며, 1990년대 초반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도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정치는 말로 움직이는데, 말이 추락하면 정치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오늘 한국의 도시에 걸린 수많은 현수막은 그 징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어느 거리든, 어느 동네든 조금만 걸으면 혐오의 문장, 모욕의 구절, 사실 확인조차 없이 의혹을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조작질한 천 조각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 문구들은 공공의 언어가 아니다. 정치적 적개심의 잔해이자, 민주주의의 품격을 무너뜨리는 정치 환경 오염물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미관의 문제도, 일시적 선동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한국 정치의 체질이 어디까지 타락했는지를 선명히 드러내는 전조(前兆)다.

지난 11월 12일 광주 서구 광주시청 앞 도로변에 제주4·3 왜곡 내용이 담긴 내일로미래로라는정당의 현수막이 게시돼있다.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2월호=원광연 기자] 아무 데서나 싸지르는 배설의 정치
지금 보수 정치권이 거리에서 벌이는 현수막 정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훈육받지 못한 야생의 짐승들이나 저지르는 분간없는 배설행위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한 비유일 것이다. 그들은 공공의 영역을 자신들의 분노와 혐오를 배출하는 하수구로 여기고 있다. 정제되지도 검증되지도 않은 주장, 오로지 적개심만을 충동질하려는 문구들이 도시의 교차로와 거리 곳곳을 뒤덮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표현에서 한참 벗어난 공공재에 대한 오염과 훼손이며, 시민의 안녕에 대한 도발과 폭력이다.
배설물은 원래 적절한 장소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극우 세력들은 그 기본적인 위생조차 지키지 않는다.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 정치적 무능에서 비롯된 독소를 정화 과정 없이 거리 한복판에 쏟아붓는다. 시민들은 출근길에, 등하굣길에, 시장을 보러 가는 길에 이 정치적 분뇨를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한다. 선택권은 없다. 눈을 감고 걸을 수가 없기에 동의 없는 노출, 일방적 오염에 무방비 상태다.

근묵자흑의 정치학…일베와 펨코가 거리로
현재 거리에 걸린 현수막 문구들의 출처를 추적하면, 그 뿌리가 어디인지 금세 드러난다. 일베(일간베스트), 펨코(에펨코리아)를 비롯한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던 혐오 표현들이 이제 공식 정치의 언어로 둔갑해 도심 한복판에 버젓이 걸려 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이다. 보수 정치권은 스스로 일베의 언어를 학습하고, 펨코의 문법을 체화하며, 그 추악한 레토릭을 자신의 것으로 활용한다. 과거에는 이런 표현들이 익명의 게시판에서나 통용되던 ‘비주류의 언어’였다. 정치권은 적어도 공식 석상에서는 이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최소한의 품격이었고, 정치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범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극우화된 보수 정치세력은 그 경계를 스스로 허물고 있다. 인터넷 극우 커뮤니티의 조롱과 비하, 음모론과 왜곡을 그대로 가져다 현수막에 도배하고, 그것을 시민들의 눈앞에 갈겨 댄다. 일베가 거리로 나온 것이다. 펨코의 악취가 도시 전체를 뒤덮은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제 여성혐오 커뮤니티까지 정치의 언어 공급처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여성판 일베’로 불리는 커뮤니티들에서 생산된 혐오 표현들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오고, 그것이 다시 현수막이 되어 거리에 걸린다. 혐오의 생태계가 완성된 것이다. 온라인의 쓰레기가 오프라인의 공공 공간을 점령하는 순환 구조가 확립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타락이 아니라, 정치 문화 전체의 하수구화다.

지난 1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과 시내 거리에 현수막 정치를 한다는 내일로미래로라는 정당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일베도 울고 갈 저질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는 원래 정교한 설계와 전략을 필요로 한다. 효과적인 선전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어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는 기술이다. 나치의 괴벨스가 그랬고, 소련의 선전 기구가 그랬으며, 냉전 시대 양 진영의 심리전이 그랬다. 프로파간다는 최소한 ‘설득의 기술’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 보수 정치권이 쏟아내는 현수막은 프로파간다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다. 전략도 없고 논리도 없으며, 오직 날것의 분노와 조롱만 있다. 일베도 울고 갈 저질스러움이다. 적어도 일베는 나름의 ‘재미’를 추구했고, 조롱에도 일정한 맥락이 있었다. 물론 그 재미와 맥락이 혐오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최소한 자기 논리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 거리에 걸린 현수막들에는 그마저도 없다. 오직 분노의 배설, 적개심의 토사물만 있을 뿐이다.
“중국 유학생은 잠재적 간첩”,
“유괴, 납치, 장기적출, 엄마들은 무섭다“,
“중국공산당+선관위=가짜 대통령(이재명)”,
“중국 개입 부정선거”.
이러한 문구들은 단 1%의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고 맥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법적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사안을 단정하고,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기정사실화하며, 오직 선거로 인한 열패적 감정을 흔들고 적개심을 자극할 목적으로 설계된 문장이다. 이것을 프로파간다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프로파간다의 탈을 쓴 정치적 자해 행위이고, 선동의 형식을 빌린 자기 파괴다.

노골적인 혐중 표현과 터무니없는 주장을 담은 현수막 [MBCNEWS 유튜브 방송 화면 갈무리]


현수막 규제의 부재가 낳은 풍경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현행 옥외광고물법과 관련 조례들은 현수막의 내용에 대한 실질적 규제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설치 위치, 규격, 기간에 대한 형식적 규제는 있지만, 혐오 표현이나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한 내용적 규제는 사실상 공백 상태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 아래,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되고 있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정치적 비판과 풍자, 반대 의견의 표명은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혐오 표현,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는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없다.
문제는 현행법이 이런 경계를 명확히 긋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수막 내용에 대한 사후 제재는 있지만, 그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실효성도 떨어진다. 결과적으로 혐오의 현수막은 한 달, 두 달씩 거리에 걸려 있다가 슬그머니 철거되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혐오의 현수막이 걸린다.
일부에서는 현수막 내용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혐오 표현이나 명백한 허위 사실을 담은 현수막에 대해서는 신속한 철거와 제재가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표현의 자유와의 균형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다. 누가 혐오를 판단하고, 누가 허위를 결정할 것인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는 없는가. 이런 우려들이 규제 논의를 더디게 만들고 있고, 그 사이 거리는 계속 오염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후죽순 현수막 게첨만을 목표로 하는 ‘현수막 전문 정당’이 난립하고 이를 통해 돈벌이를 하는 ‘현수막 생태계’가 조성된 점이 큰 이유라고 하겠다.

명동 진입하려다 경찰에 막힌 혐중 시위대 ©연합뉴스


나락 간 한국 정치의 자화상
현수막 공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한국 정치가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공적 담론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민주주의의 품격이 어느 수준까지 떨어졌는지다. 나락 간 정치의 증거물이 도시 곳곳에 걸려 있는 셈이다.
보수 정치권의 극우화는 이 나락의 핵심 원인이다. 한국 보수는 오랜 시간 동안 변화를 겪어왔지만, 최근 몇 년간의 흐름은 분명히 ‘극우적 퇴행’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보수 정치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가치인 ‘책임, 절제, 공공성, 품격’이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혐오와 음모론, 조롱과 왜곡이다. 이것은 단순히 보수의 색채가 짙어진 것이 아니다. 보수가 자신을 구성하던 윤리적 기반을 스스로 해체한 것이다.
과거의 보수는가 강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기 언어에는 일정한 규범과 통제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는 그마저도 포기했다. 대신 극우 커뮤니티에서 확산된 조롱 문구, 음모론적 낙인, 근거 없는 비난을 가져다 거리 외벽에 그대로 걸어놓는다. 정치적 책임감은 보이지 않고, 선동의 편의성만 살아 있다. 극우화가 심화될수록 보수는 기반을 잃는다. 이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보수 본연의 붕괴 과정이다.

적대의 구조가 일상을 점령할 때
정치학자 샹탈 무페가 말한 ‘적대적 정치(antagonism)’는 바로 이 지점을 설명한다. 무페는 “정치가 갈등을 생산하고 조정할 능력을 잃으면, 갈등은 의견 차이가 아니라 적대의 구조로 변한다”고 했다. 갈등은 협상이 가능하지만, 적대는 협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지금 한국 거리의 현수막은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가 아니라 적대를 조장하는 정치의 실물판이다.
이러한 현수막이 도시를 뒤덮는 순간, 시민은 의도치 않게 매일 이 언어를 소비해야 한다. 정치적 의지를 떠나 강제 노출되는 언어가 시민의 감각을 잠식한다. 아침마다 지나치는 길목에서 적대의 언어를 본 사람은 더 이상 정치적 대화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정치적 토론을
‘무의미한 싸움’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공론장은 좁아지고, 민주주의는 갈등을 조율하는 능력을 잃는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미래 세대다. 정치적 언어를 처음 접하는 10대, 20대가 매일 혐오 문구를 보며 성장한다면, 그들은 정치란 원래 모욕적이고 시끄러우며 감정적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대화와 조정, 타협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대와 선동이 각인된다. 정치적 혐오의 만연은 결국 시민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 순간 민주주의는 기반을 스스로 잃는다.

광주 도심에 걸린 ‘부정선거’ 정당 현수막 ©연합뉴스


배설과 카타르시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보수 정치권이 거리에 쏟아붓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은 이것을 ‘국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라 말할지 모른다. 억눌린 감정의 해소, 정치적 카타르시스라고 포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설과 카타르시스는 전혀 다른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억압된 감정이 예술적 형식을 통해 정화되고 승화되는 경험을 말한다. 관객은 비극적 서사를 보면서 공포와 연민을 느끼고, 그 감정이 정제된 형태로 해소되면서 정신적 정화를 경험한다.
여기서 핵심은 ‘형식’과 ‘승화’다.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구조를 통해 걸러지고 변형되어 더 높은 차원의 경험으로 전환된다. 카타르시스는 건설적이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된다.
반면 배설은 단순한 배출이다. 체내의 노폐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생리적 행위일 뿐, 거기에는 어떤 정화도, 승화도 없다. 배설물은 배설물일 뿐이다. 적절한 장소에서 처리되면 위생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아무 데서나 싸지르면 그것은 오염이고 공해이며 타인에 대한 폭력이다.
지금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 세력이 거리에서 벌이는 현수막 정치가 바로 그러하다. 그들의 분노는 어떤 형식도 거치지 않았고, 어떤 정제도 경험하지 않았으며, 어떤 승화의 과정도 거치지 않는다. 극우 커뮤니티에서 흘러나온 똥내 나는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현수막에 인쇄하고, 그것을 시민들의 눈앞에 내걸었다. 이것은 정치적 표현이 아니라 공공장소에서의 노상방뇨 행위와 다름없다.

말 해야 할 때는 침묵하던 자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배설의 주체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엄혹한 독재 시절,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인권이 유린될 때 이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2024년 12월,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하던 그 내란의 밤에 이들은 무엇을 했나. 입이라도 벙긋한 의원은 백에 한둘이고 그 사람들은 국민의힘이라는 배에서 탈출한지 오래다. 대부분은 찍소리는커녕 내란에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방조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순간에 한마디 비판도 하지 못하던 세력이, 지금은 거리 곳곳에서 언론의 자유를 만끽하는 아이러니.
할 말 해야 할 때는 꿀 찾는 벙어리가 되고, 가짜뉴스 발 선동질에는 그토록 열심이다. 내란에 대한 자기반성은 없고, 보수의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다. 오로지 이재명 정권 흠집내기에만 골몰한다.
정책 대안도 없고, 국정 비전도 없으며 자신들이 저지른 헌정 유린에 대한 성찰은 더더욱 없다. 남은 것은 오직 상대에 대한 비방과 왜곡, 검증되지 않은 의혹의 반복뿐이다. 이것이 제1야당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정당의 현주소다.

이재명 대통령의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이 열린 11월 4일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회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속한 해산이 최선
국민의힘은 스스로 해산해야 할 이유를 날마다 더하고 있다. 내란 가담 세력을 품고, 극우 커뮤니티의 언어를 학습하며, 공공 공간을 혐오의 배설물로 오염시키는 이 정당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이라고 볼 수 있는가. 양심이 있다면 이들이 보수를 대표한다고 말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이들은 이미 극우라 불러 마땅하며 쓰러져 가는 보수세력의 시체에 기생하는 구더기 무리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더러운 분뇨는 빨리 흙으로 덮어 없애야 한다. 그래야 썩어서 비료의 기능이라도 한다. 햇볕 아래 방치된 배설물은 악취만 풍기고 질병만 퍼뜨릴 뿐, 어떤 생산적 역할도 하지 못한다.
지금 국민의힘이 극우세력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리에 뿌려놓은 현수막들이 바로 그러한 증거물들이다. 하루라도 빨리 매립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한국 정치사의 반면교사로서, 실패한 보수의 기록으로서 의미라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희망 없는 보수 세력, 이 썩은 껍데기가 사라져야 새로운 보수가 자라날 토양이라도 마련된다. 지금의 국민의힘은 보수의 미래가 아니라 보수의 무덤이다.
그 무덤 위에 계속 분뇨를 쌓아올리는 한, 한국의 보수주의는 영원히 소생을 기약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언어의 미학을 수렴한다. 법과 제도, 조직과 권력보다 먼저, 정치는 언어로 작동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대안을 설명하며, 사회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한 나라의 정치 언어가 보여주는 품격은 곧 그 나라 정치의 품격이다. 언어가 추락하면 정치가 추락하고, 정치가 추락하면 결국 국가는 흔들린다.
도시는 시민이 주인인 공간이고, 정치는 시민을 향해 품격 있는 언어로 아뢰야 한다. 그것이 주권자인 국민을 향한 상식적인 예의이기 때문이다. 혐오 언어의 유통을 멈추고 진심과 책임있는 설득의 언어로 돌아와야 한다.
혐오는 결코 민주주의의 동력이 될 수 없다. 분열의 언어는 결국 그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 주체의 기반을 먼저 붕괴시킨다.
결국 지금의 현수막 정치는 국민의힘과 극우세력이 어떻게 한국 보수의 자기파괴적 행보를 보여주었나를 증명하고, 정치적 담론을 어떻게 추문화했는지를 기록하는 부끄러운 아카이브나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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