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9일 정부세종청사 기재부 기자실에서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열고 있다./연합뉴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대기업들이 인공지능(AI) 및 반도체 등 미래산업의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면서 오래된 규제인 ‘금산분리’ 완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 핵심 부처에서는 연이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자금 조달의 숨통을 틔워야 한다는 재계의 주장과, 금융·산업의 분리를 유지해 시장 집중과 독점화를 방지해야 한다는 정부 철학이 정면으로 맞서는 양상이다.

19일 경제계에 따르면 주요 그룹은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행 금산분리 제도가 글로벌 투자 경쟁력 확보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보고 제도 손질을 요구하고 있다. 에스케이(SK)그룹 등은 지주회사 아래에 벤처투자를 총괄하는 전문 GP(운용사) 형태의 투자회사를 둘 수 있어야 한다며, 정부와 국회에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이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를 만나 인공지능 산업에 한해 새로운 형태의 규제 조정을 검토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재계는 “투자환경 개선 논의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AI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대규모 자본 투입이 가능한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도 공정거래위원회 수장은 확실한 선을 그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이날 통화에서 “대기업이 투자를 확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금산분리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우리 기업들은 본업에서 벌어들인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소프트뱅크 사례를 언급하며 “소프트뱅크는 원래 투자 중심의 사업 모델을 가진 회사지만, 국내 대기업은 제조업 기반의 구조여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프트뱅크가 기술 투자기업으로 변모한 뒤 공격적 자금 운용을 바탕으로 글로벌 유니콘들을 키워냈다는 점을 들어 한국 대기업도 투자회사로 진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재계는 무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주 위원장은 “국내 기업도 이용할 수 있는 다른 자금조달 수단이 많다”며 특정 규제를 급하게 손대면 산업집중 심화, 시장 교란 등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기존 규제 체계를 흔들려는 유혹이 많지만, 시장 독점과 지배력 강화는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획재정부 역시 신중론을 유지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대규모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은 이미 준비돼 있다”며 국민성장펀드 등 대형 펀드를 예로 들었다. 그는 “금산분리까지 손댈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필요한 경우 기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관계부처와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당장 규제완화는 어렵지만 추이를 보며 검토는 가능하다”는 절충적 입장이다.

반면 재계는 세계 AI·반도체 시장의 속도를 감안하면 규제 완화를 늦출 여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날 대한상공회의소 회관에서 열린 여야 정책 간담회에서도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금산분리 완화와 지배구조 규제 개선 등을 담은 건의안을 정치권에 공식 제출했다. “국내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취지다.

결국 AI·반도체 등 미래산업 전쟁의 열쇠를 쥔 것은 ‘누가 더 많은 자금을, 더 빠르게 투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러나 그만큼 금융·산업의 경계를 허무는 결정은 시장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구 부총리는 이날 간담회에서 재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금산분리 규제완화' 요구와 관련해 "금산분리의 근본적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정부가 못하는 부분에 대규모 자본조달이 꼭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과 범위로 할지 관계부처와 협의해 적극적으로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다만 구 부총리는 "금산분리 (완화를 논할) 단계까지는 아니다"라며 "국민성장펀드 조성으로 해소할 수 있는 부분은 먼저하고, 그래도 돈이 부족하다고 하면 그런 부분까지 논의해가겠다"고 강조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