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31일 경주에서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연합뉴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일본의 외교 지형이 다시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만 해협 유사시 자위대가 출동할 가능성을 공식 언급한 뒤, 중국 정부가 이를 ‘직접적 도발’로 규정하며 사실상 보복 절차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오랜 긴장과 경제 협력 사이에서 유지해 온 미묘한 균형이 총리 취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무너지는 양상이다.
정국의 불씨는 지난 7일, 다카이치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던진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그는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무력 공격이 발생하면 일본의 ‘존립위기 사태’에 해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표현은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일본 안보정책에서 가장 민감한 키워드 중 하나다. 사실상 대만 분쟁에 일본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특히 오사카 중국 총영사의 X(트위터) 계정에는 “멋대로 쳐들어온 그 목을 벨 수밖에 없다”는 노골적 표현까지 등장했다. 일본 정부는 “외교관으로서 도를 넘었다”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중국 외교부는 오히려 일본 측을 비난하며 다카이치의 발언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정면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 정부는 일본 여행을 자제하라는 호소문을 발표했고, 국적 항공사들은 일본행 항공권 환불·변경 수수료 면제를 일제히 통보했다.
일본 내에서는 이 조치를 ‘사실상의 한일령(限日令)’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중국이 한때 한국에 시행했던 ‘한한령’과 유사한 형태로, 중국 정부가 여론과 경제를 동원해 상대국을 압박하는 전형적 수단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특히 일본 관광 산업은 올해 1~9월 748만 명에 달하는 중국 관광객에 의존하고 있어, 연말 관광 성수기를 앞두고 피해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급격히 커졌다.
중국이 단순한 여행 자제 권고에서 더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2012년 센카쿠 열도 갈등 당시 중국 내 반일 감정이 폭발하며 일본 기업들이 대규모 피해를 본 경험이 있다. 일본 언론들은 “중·일 관계가 개선 기류를 보이던 국면에서 다시 대립으로 돌아서고 있다”며 다카이치 정부의 외교적 대응 능력이 첫 시험대에 올랐다고 분석하고 있다.
문제는 다카이치 총리가 이미 강경한 발언을 뱉어낸 이상, 중국의 압박에 쉽게 물러설 경우 ‘초기 리더십 실패’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 내부 정치 계산, 중국의 전략적 대응, 그리고 대만 문제라는 동아시아의 구조적 갈등이 한 지점에서 엉켜 가면서 신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거센 역풍에 직면하고 있다.
2017년 3월, 오산기지로 이송된 사드
한미 양국 군 당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주한미군 배치작업을 전격적으로 시작했다. 2016년 7월, 한국 정부가 미국과 함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를 경북 성주에 배치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중국의 보복조치의 일환으로 '한한령'을 시작됐다. 2016년 하반기부터 한국 문화·관광 분야를 중심으로 비공식적 금지령이 촉발됐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韓, 경제·외교·관광 등 그 여파에 고심
ㅇ사실상 ‘한일령’을 발동했지만, 그 파장은 일본을 넘어 한국까지 확산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일 관계와 중일 관계가 동시에 흔들리는 구조 속에서, 한국은 관광·물류·안보·산업 공급망 등 여러 분야에서 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우선 관광 분야에서는 복합적 변화가 예상된다. 중국 관광객이 일본을 기피할 경우, 일부 수요가 한국으로 우회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단기적 유입 증가는 가능하나, 중국 정부가 한국 관광 역시 규제 대상에 포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실제 한국은 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으로 7년 넘게 중국 관광객 감소를 경험한 바 있으며, 중국은 특정 이슈를 계기로 관광·문화 분야를 압박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경제적으로는 한·중·일 공급망의 미묘한 균형이 흔들릴 우려가 있다. 일본 기업이 중국 내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있으나, 반대로 중국이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한국을 ‘우회 견제’하는 추가 조치를 내놓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첨단 제조업 분야처럼 3국이 얽혀 있는 산업에서 압력이 가해지면 한국 기업들도 영향권에 들 수 있다.
외교적으로는 동북아 긴장이 높아지는 것이 한국의 부담 요인이다. 일본 총리의 발언은 대만 유사시 ‘미·일 공동 개입’을 전제하는 해석을 낳았고, 중국의 반발은 동아시아 안보 지형 전반을 뒤흔들었다. 한국 정부는 현 상황에서 미·중 간 외교 균형, 일본과의 안보 협력, 대만 문제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복잡한 딜레마에 직면한다.
또한 한국의 대중국 수출에도 간접적 충격이 예상된다. 만약 중국이 일본 견제를 강화하면서 주변국에도 경제적 압박 메시지를 보낼 경우, 한국 역시 과거 사드 사태 때와 비슷한 위험에 다시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일본 제재가 강화될수록 한국도 ‘정치·외교적 긴장 증가’라는 구조적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결국 이번 한일령은 일본을 겨냥한 조치이지만, 동북아 경제·정치·안보 네트워크가 촘촘히 연결된 특성상 한국 역시 그 여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중국의 압박, 일본의 대응, 미국의 전략, 대만 문제라는 4개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히는 가운데, 한국이 어떤 외교적·경제적 전략을 택하느냐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