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문빅토르미술관에는 지금, 한 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역사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이 강렬하게 흐른다.
강제이주 88주년, 고려인마을에 정착한 세계적인 고려인미술거장 문빅토르(73) 화백이 최근 선보인 작품 〈황금열차〉, 〈감시〉,〈나스쟈-유희극장〉은 거대한 폭력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고려인의 운명, 그 처절하고도 길었던 투쟁의 기록이다.
세 작품은 서로 다른 시대와 감정의 결을 품고 있다. 하지만 한 축으로 연결된다. ‘거짓 선전 선동에 속아 열차에 오른 순간’, ‘전체주의의 감시 속에 짓눌린 삶’, ‘조롱과 차별 속에서도 인간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현실’. 문 화백의 회화는 그 고통의 시간을 역사로만 남기지 않고, 후손들에게 살아 있는 목소리로 다시 불러낸다.
문 화백의 작품 〈황금열차〉는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잔혹한 진실을 드러낸다. 그는 스탈린이 고려인 지도자 3천 명을 먼저 처형하고, 남은 고려인들에게 “중앙아시아에 도착하면 넓은 토지와 보삼금을 주겠다” 는 달콤한 거짓말을 퍼뜨렸다는 사실을 캔버스 위에 되살렸다. 그 거짓은 열차의 이름까지 ‘황금열차’라 부르며 사람들을 스스로 이주 열차에 오르게 만든 선전 선동이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40일 동안 혹한 속을 달린 화물열차, 수만 명이 굶주림·동사·질병으로 죽어간 죽음의 행렬이었다. 도착지는 물조차 없는 사막 한가운데, 토굴을 파고 버텨야 하는 황무지였다.
세계적인 고려인미술거장 문빅토르(73) 화백의 작품 〈황금열차〉, 〈감시〉, 〈나스쟈(유희극장)〉/사진=고려인마을 제공
문 화백은 황금빛 관악기와 열차를 전면에 배치해 ‘유혹의 선전’을 상징하고, 그 뒤편을 뒤덮는 회색·어두운 푸른색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를 대비시킨다. 열차를 바라보는 인물의 암울한 표정에는 크렘린궁이 벌인 이중적 폭력을 고발하는 감정이 서려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국가 없는 민족이 겪어야 했던 서러움과 배신을 후손들이 절대 잊지 않기를.” 강조한다.
이어 그의 작품 〈감시〉는 문 화백이 고국에 영구 귀환한 뒤 처음 그린 작품으로,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공포와 억압의 기억을 서사적으로 풀어낸다. 작품 속에는 망원경·돋보기 너머로 보이는 강제이주 열차, 새장에 갇힌 새, 중앙아시아 황무지, 크렘린 궁의 상징 등이 복합적으로 배치된다.
소련의 감시 요원들의 눈과 손, 그리고 중앙에 놓인 ‘감시 기구’의 이미지들은 전체주의의 감시 체계가 고려인의 삶을 어떻게 아슬아슬하게 옥죄었는지를 상징한다. 문 화백은 자신을 포함한 고려인이 “작은 새처럼 갇혀 살았다”고 고백한다. 진실을 말할 자유도, 떠날 자유도 없이 감시 속에 존재해야 했던 삶을 그는 섬세한 점묘법으로 그려낸다.
조국에 돌아온 그는 “바람에 실려 오는 자유의 향기가 오래 지속되기를… 그 소중함을 작품으로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따라서 〈감시〉는 이주 과정의 비극뿐 아니라,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정치적 억압의 시간까지 포괄한 회화적 증언이다.
또 다른 작품 〈나스쟈-유희극장〉은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살아야 했던 고려인의 운명을 풍자극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작품 속 인형극 무대에는 한복을 입은 남녀 고려인이 메달려 있다. 이들은 ‘유희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객석에 보이지는 않지만, 러시아인들의 야유와 조롱이 들리는 듯한 장면 구성이다.
문 화백은 고려인 선조들이 ‘노력영웅’이라는 허울좋은 칭호 아래 노동력 착취에 동원됐던 현실을 이 작품에 녹여냈다. 소금밭을 3년 만에 옥토로 바꾸는 처절한 노동도, 그 뒤에 이어지는 또 다른 강제노역도 모두 ‘미화된 근면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나스쟈-유희극장〉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다. 멸시·천대·노동착취·문화적 조롱이라는 다층적 폭력 속에서도 인간으로 살아내야 했던 고려인의 심연을 담은 기록이다. 그는 가난하고 헐벗은 민족을 희롱거리로 만든 제국의 폭력은, 오늘날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한다. 고려인을 동포라 부르지만 실상은 외국인노동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세 작품은 서로 다른 형식과 이미지, 감정을 담고 있지만 끝내 한 지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국가 없는 민족의 처절함”, 그리고 “역사는 예술로 남겨져야 후손이 기억한다” 는 화백의 신념이다. 〈이주의미: 황금열차〉는 거짓 선동과 대량학살의 시작을, 〈감시〉는 억압과 두려움 속의 삶을, 〈나스쟈-유희극장〉은 차별과 조롱 속에서도 인간 존엄을 지키려는 생존을 보여준다.
문 화백은 자신의 삶 전체를 작품으로 증언하고 있다. 고려인의 강제이주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상처이자 기억,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경고이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국가 없는 한 개인은, 한 민족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문 화백의 〈이주의미: 황금열차〉·〈감시〉·〈나스쟈-유희극장〉은 광주 고려인마을 문빅토르미술관에서 상설 전시 중이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미술 작품이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적 고통을 시각 언어로 기록한 ‘기억의 증언관’ 과도 같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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