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연합뉴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중국의 ‘천인계획(千人計劃)’이 한국 과학기술계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겉으로는 해외 인재 유치를 위한 국가 프로젝트이지만, 실상은 선진국의 핵심 기술을 흡수하기 위한 정교한 포섭 작전이라는 평가가 잇따른다. 최근 몇 년간 국내 연구자와 기술자들을 상대로 한 중국 측의 접근이 노골적으로 늘고 있으며,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대학, 대기업 연구소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서울의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지난해 여름, 자신이 쓴 논문이 실린 국제 학회지를 통해 한 중국 대학 교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귀하의 연구를 인상 깊게 읽었다”며 “중국에서 독립적인 연구소를 맡아줄 기회를 주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이메일에는 구체적인 급여 조건과 연구비 지원 규모가 적혀 있었다. 연봉은 현재의 세 배, 연구비는 제한이 없다는 파격적 조건이었다. 가족의 이주 지원과 주택 제공, 전용 실험실까지 약속돼 있었다. 그는 “내 연구 이력뿐 아니라 자녀의 학교와 최근 불만사항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며 “누군가 내 인생을 세밀히 조사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천인계획은 2008년 중국 정부가 시작한 해외 인재 유치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그 목적은 단순한 인재 영입이 아니라 기술패권 경쟁에서 미국을 추월하기 위한 ‘기술굴기(技術崛起)’ 전략의 일환이었다.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항공우주 등 첨단 분야의 핵심 기술자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은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포섭 대상은 대학 교수와 연구원은 물론, 빅테크 기업 임원과 정부 연구기관 관계자까지 폭넓게 포함된다. 중국은 그들에게 파격적인 보상과 특혜를 약속하며 손을 내민다.

미국 정보당국은 천인계획을 “기술 유입을 위한 제도화된 통로”라고 규정했고, 서방 언론들은 이를 “헤드헌팅을 가장한 국가 차원의 첩보 공작”으로 보도해왔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는 고위 공무원과 국방 관련 연구자, 아이비리그 교수들이 천인계획에 참여했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잇따랐다. 하버드대 나노기술 권위자인 찰스 리버 교수는 미국 국방부의 기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천인계획에서 거액의 자금을 수령한 사실을 숨겼다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후 중국 칭화대 석좌교수로 부임하며 사실상 중국 측의 품으로 돌아갔다. 미국은 자국 내 기술인력의 유출을 막기 위해 강력한 법적 제재에 나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포섭 시도는 멈추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한국에도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KAIST의 한 교수가 자율주행 기술을 중국에 넘긴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가 있었고, 국내 연구소에 근무하던 중국인 연구원이 기술 자료를 빼돌려 천인계획에 제출한 뒤 지원금을 수령한 사실도 드러났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방위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 분야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단순한 기술 유출을 넘어, 중국은 이제 한국의 기술자 자체를 ‘이동’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기술을 훔치는 대신 기술을 가진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이다.

중국과학원 연구원./연합뉴스


최근에는 국내 연구기관과 대학을 상대로 한 천인계획의 접근이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음이 확인됐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KAIST 연구자 149명이 천인계획 초빙 이메일을 받았고, 정부출연연구기관에도 600건이 넘는 유사한 제안이 전달됐다. 이들 메일에는 대상자의 연구 분야와 논문 성향, 가족관계, 심지어 직장 내 불만까지 반영된 ‘맞춤형 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에선 은퇴 후 연구를 이어가기 어렵지 않으냐”는 설득부터, “중국으로 오면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한다”는 유혹까지 구체적이었다. 경북대 류재웅 교수는 “제안서를 보고 놀랐다. 내 상황을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다”며 “솔직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천인계획이 먹혀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의 과학기술 인력 처우는 여전히 낮고, 연구 환경은 경쟁국들에 비해 열악하다. 연구비는 부족하고 행정 절차는 까다롭다. 정년이 가까워지면 프로젝트 참여 기회도 줄어들고, 은퇴 후 재취업의 문은 사실상 닫혀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조국을 떠난 연구자”를 비난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문제는 국가 차원의 대응이 부실하다는 점이다.

한 안보 전문가는 “기술 유출은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 문제”라고 경고했다. “한 연구자가 가진 노트북 한 대, 연구 보고서 한 장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 지금처럼 연구 인력에 대한 보상 체계가 불합리한 상태라면, 천인계획 같은 외부 유혹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천인계획은 단순한 인재 유치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로 세계를 재편하겠다’는 국가 전략의 일환이다. 기술이 곧 무기이자 권력이 된 시대, 과학자는 국가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한국이 기술 인력의 가치와 중요성을 외면한 채 현실을 방치한다면, 그 대가는 곧 국가 경쟁력의 약화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 중국의 포섭 공세를 단순한 외국의 스카우트 활동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미 ‘조용한 침투전’이자, 기술 패권을 향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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