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2025년 11월호- 김향란 칼럼니스트] 인간은 언어보다 먼저 색으로 세상을 인식했다. 그리고 색은 곧 ‘질서와 위계’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었다. 권력의 역사는 곧 색의 역사다. 왕의 옷, 종교의 제의복, 정치의 깃발, 기업의 로고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언제나 색을 통해 자신을 시각화했다. 색은 단순한 시각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공포, 통제와 복종의 구조를 암시하는 상징체계였다.

고대 로마에서 ‘퍼플(Purple)’은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절대색이었다. 바다 달팽이에서 추출한 티리안 퍼플은 1그램을 얻기 위해 수천 마리의 생명을 희생시켜야 했고, 이 색을 입을 수 있는 자는 황제뿐이었다. 색의 희소성과 생산의 어려움이 곧 권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즉, ‘색의 독점’은 곧 권력의 독점이었다. 중세의 교황이 금색과 자주색으로 장엄함을 과시한 것도, 왕권이 붉은 망토로 절대성을 드러낸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색은 인간의 심리적 위계질서를 시각화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근대 이후 색의 의미는 변한다. 산업화는 색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민주주의는 색의 귀족적 권위를 해체했다. 그러나 색은 여전히 권력적이다. 예컨대 정치에서 ‘보수의 빨강’과 ‘진보의 파랑’은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가치관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시각 언어이며, 기업의 로고에서도 그러하다. 금융권의 짙은 네이비, 글로벌 IT기업의 블루는 신뢰와 통제를, 럭셔리 브랜드의 블랙과 골드는 위엄과 배타성을 표현하곤 한다. 색은 감정의 권력으로서, 무의식 속에서 인간의 판단을 지배한다.
미셸 푸코는 권력을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흐르는 힘’으로 보았다. 색 역시 그러하다. 권력의 색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감정과 관계의 맥락 속에서 재구성된다. 현대 사회에서 레드가 더 이상 ‘왕의 피’가 아니라 ‘혁명의 열정’으로 읽히듯, 블루가 ‘신의 질서’에서 ‘기업의 효율’로 전이되듯, 색은 권력의 구조를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오늘날 권력은 물질이 아니라 ‘이미지의 힘’으로 이동했다. 온라인 세상에서 권력의 힘은 더 이상 왕좌나 관복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인플루언서의 피드 속에서, 브랜드의 색감 속에서, 대중의 감정 곡선 속에서 형성된다. 오히려 언어보다 색을 먼저 설계한다. 정치인은 넥타이의 색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기업은 브랜드 컬러로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보이는 색’이 곧 ‘보이지 않는 통제’의 수단이 된 것이다.

색은 인간의 감정적 반응을 즉각적으로 유도하는데, 붉은색은 심박수를 높이고, 파란색은 냉정함과 신뢰를 유발하며, 검정은 무게와 통제의 상징이 된다. ‘어떤 색으로 세상을 칠하느냐’는 곧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통제하느냐’의 문제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정치, 종교, 예술, 미디어는 모두 색의 힘을 영리하게 이용해왔고, 미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찌보면, 진정한 권력이란 타인을 복종시키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색을 스스로 정의하고 그 색으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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