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과 협의 없이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바깥에서의 개발 규제를 완화한 서울시 조례 개정이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번 소송은 최근 '왕릉뷰 아파트' 재현 우려가 나온 서울 종묘 맞은편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 주목받았다. 사진은 6일 서울 종로구 세운4구역 모습.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서울 도심의 심장부, 종묘 앞마당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15세기 조선의 제례 공간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 바로 맞은편에 초고층 빌딩이 들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서울 하늘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 중인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이 있다.

서울시는 종묘 인근의 고도 제한을 완화해 최고 높이를 71.9m에서 141.9m로 높이는 새로운 계획안을 마련했다. 낙후된 세운상가 일대를 다시 살리겠다는 도시재생 논리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곧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유산청의 반발을 불러왔다. 세계문화유산의 경관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다. 서울시가 고시를 바꾸자 정부 부처가 소송으로 맞섰고, 대법원은 지난 6일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서울시의회가 문화재 주변 개발을 제한하던 조례를 폐지한 것이 절차상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서울시는 곧바로 “도심 정비사업에 새 길이 열렸다”며 환영했고, 오세훈 시장은 “문화재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도심 개발을 묶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유산청과 문체부는 판결 다음 날 “종묘 앞 초고층 건물은 안 된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갈등은 행정적 논쟁을 넘어 정치적 대립으로 확산됐다.

이재명 정부와 오세훈 시장의 충돌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논쟁의 뿌리는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대 중반 세운상가 재개발이 추진될 때부터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고층화는 종묘의 문화경관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문화재청은 서울시의 122m 고층건물 계획을 ‘보류’했다. “만약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은 국가적 수치”라는 당시 문화재위원의 발언은 지금 다시 회자된다.

그럼에도 보수·경제 언론은 이번 논란을 ‘유산청의 과잉 간섭’으로 규정하고 있다. 매일경제는 “도쿄 황궁 인근에도 180m짜리 마천루가 있다”며 “한국만 유난히 문화재를 이유로 개발을 막는다”고 비판했고, 조선일보는 “문화유산 보호도 도를 넘으면 완장 행정이 된다”고 했다. 문화재와 마천루의 ‘공존’을 강조하지만, 정작 유네스코의 권고나 세계유산 등재 조건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법원, 서울시 문화재 조례개정 유효 판결


종묘는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다. 조선 왕조의 제례 공간이자, 한국이 세계문화유산 제도에 처음 이름을 올린 장소다. 유네스코는 등재 당시 “종묘의 시각적 통합성을 해칠 수 있는 주변 고층 개발은 제한돼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권고를 무시하면 등재 취소 절차가 시작될 수도 있다. 실제로 독일의 쾰른 대성당은 2004년 고층건물 건설 시도로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격하됐고, 드레스덴의 엘베계곡은 다리 건설을 강행하다가 결국 세계문화유산 자격을 잃었다.

서울시의 논리는 명확하다. “노후화된 도심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세훈 시장은 유튜브를 통해 “세운상가 일대는 도시의 상처”라며 “세계 어디에도 50년째 낡은 건물이 버티는 수도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화유산 전문가들은 ‘개발의 속도’보다 ‘도시의 품격’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심 재생이 곧 고층화는 아니다. 경관과 조화된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본 사례도 자주 거론된다. 황궁 주변에 초고층 빌딩이 들어선 도쿄 마루노우치는 ‘공존의 모델’로 소개되지만, 일본 황궁은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유네스코의 보호 대상이 아닌 지역과, 국제적 규제를 받는 종묘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평가다.

논란은 앞으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서울시는 “재개발을 더 미룰 수 없다”고 하고, 국가유산청은 “세계문화유산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행정 절차는 법적으로는 끝났지만, 국제사회의 시선은 이제 시작이다.

한 문화유산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쾰른과 드레스덴도 처음엔 ‘이 정도는 괜찮겠지’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 번 손상된 경관은 복원되지 않는다. 문제는 높이 140미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문화유산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시선이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