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했다. 노딜 우려가 컸던 상황에서 이뤄진 이번 합의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 세부 내용과 관세율 조정을 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이뤄진 이번 협상은 일본, 유럽연합에 이어 세 번째로 타결된 것이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한 '세 번째'가 아닌 한국만의 독자적이고 전략적인 합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번 협상에서 주목할 점은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안전장치를 확보하면서도 조선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협력 기회를 만들어냈다는 것과 그 과정도 주목해 볼만하다. 막판까지 이어진 치열한 협상 끝에 한국이 원하는 핵심 조건들을 관철시킨 과정은, 이재명 정부의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외교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을 듯하다.
한국정부 협상단과 단체사진을 찍는 트럼프 미국대통령 [출처_백악관-X]
[시사의창 2025년 11월호=김세전 시사의창 전략사업부 대표] 극적 타결까지의 과정: 노딜 우려를 딛고…터프 네고시에이터
지난 7월 30일, 한국과 미국은 관세협상의 큰 틀에 합의했다. 상호관세를 15%로 인하하고 대미투자를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3,500억 달러의 금융투자 패키지의 구조와 수익 배분 등 세부 조건에서 이견이 발생하며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상호관세는 8월 7일부터 15%로 인하됐지만, 가장 중요한 자동차 관세는 합의대로 즉시 인하되지 못한 채 25%가 유지되는 것은 뼈아픈 결과였다.
이후 3개월간 산업통상자원부를 중심으로 미국 상무부와 23차례의 장관급 회담과 셀 수 없이 많은 실무 회의가 진행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관 산업부 장관을 ‘터프 네고시에이터(tough negotiator)’라고 언론 앞에서 직접 평가를 내릴 정도로 그 과정은 치열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세 차례에 걸쳐 로트닉 상무장관과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정상회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타결 전망은 불투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고, 국가안보실 차장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부정적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10월 29일 한미 정상회담 중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오늘 한국과 아주 훌륭한 회담을 했다. 합의를 이뤘고 무역협상을 거의 타결했다”고 발표하면서 극적 반전이 이뤄졌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과 김용범 정책실장이 10월 29일 경북 경주 APEC 미디어센터에서 한미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협상 핵심 내용 3,500억 달러의 구조
현금 투자 2,000억 달러 외환시장 안정장치 확보
대미 금융투자 3,500억 달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현금 투자 2,000억 달러다. 이는 일본이 미국과 합의한 5,500억 달러 금융 패키지와 유사한 구조지만, 한국만의 독자적인 안전장치를 포함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연간 투자 상한을 200억 달러로 설정한 것이다.
이는 2,000억 달러가 한 번에 투자되는 것이 아니라, 사업 진척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집행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약 4,200억 달러 수준임을 감안하면, 연간 200억 달러는 외환보유고의 약 5%에 불과해 단기 유출 리스크가 크지 않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연간 2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단계적으로 집행하게 되면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며 “외환시장 불안이 우려되는 경우 납입시기와 금액의 조정을 요청할 수 있는 별도 근거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일본 딜에는 없는 조항으로, 한국의 외환시장 특수성을 반영한 결과다.
또한 투자 약정은 2029년 1월까지이지만, 실제 자금 조달은 장기에 걸쳐 이뤄지며 시장에서 직접 매입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정부는 외화자산의 운용 수익(이자, 배당 등)을 주로 활용할 계획이며, 일부 필요한 경우에도 국내 외환시장이 아닌 국제금융시장에서 조달할 예정이다. 이는 국내 외환시장에 추가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이 터프 네고시에이터라 칭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10월 29일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 직전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업 협력 1,500억 달러: 마스가 프로젝트의 기회
두 번째 축은 조선업 협력 1,500억 달러다. 이른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부분은 한국 기업이 주도권을 갖고 추진하는 방식으로 합의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CEO 서밋 연설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던 이 프로젝트는, 미국의 조선업 현대화와 해군력 강화에 한국의 우수한 조선 기술이 기여하는 구조다.
중요한 점은 한국 기업의 투자뿐 아니라 보증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규 선박 건조 시 장기 금융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선박금융(Ship Finance)을 포함시켜 외환시장 부담을 줄이면서도 한국 기업의 선박 수주 가능성을 높였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한국 조선 3사는 친환경 선박, 해양 플랜트, LNG 운반선, 군함 정비 등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어 대규모 수주가 기대된다.
정부는 한미 간 조선 협력 협의체를 출범시켜 가시적 성과를 빠르게 도출할 계획이다. 미국 정부도 연방 토지 임대, 용수·전력 공급, 구매계약 주선, 규제 절차 신속 진행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자동차, 25%에서 15%로 숨통 트여
가장 시급했던 것은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관세였다. 일본과 유럽연합은 이미 15%의 관세를 적용받고 있었지만, 한국은 한미 FTA가 있음에도 25%의 고율 관세에 시달렸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분기에만 25% 관세로 인해 1조 5,000억 원이 넘는 영업이익 손실을 기록했고, 이 상황이 연말까지 지속됐다면 연간 영업이익이 최대 6조 원 이상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이번 합의로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관세가 기존 25%에서 15%로 낮춰지면서, 현대차·기아·한국GM·르노코리아 등 주력 완성차 업체들의 수출 채널이 정상화됐다. 미국 내 전기차 공장 가동률 제고와 현지 조달망 확충이 더해지면 실적 회복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다만 한미 FTA 2.5% 특혜가 사라진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일본, 유럽과 동일한 경쟁 여건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고 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도체, 대만 대비 불리하지 않은 조건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에 대해 100%, 200%의 고율 관세를 언급하며 어깃장을 부려왔다. 하지만 이번 합의에서 한국은 주요 경쟁국인 대만과 비교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받기로 합의 했다. 반도체는 모든 가전제품, 전자제품, 자동차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이기 때문에 품목별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만이 15% 상한선을 적용 받는다면 한국도 그 이하 수준을 보장받는다는 의미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TSMC와 같은 경쟁사보다 조금 더 나은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반도체를 전략 산업으로 지정한 미국이 차별적 고율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성과로 평가된다.
의약품과 기타 품목, 최혜국 대우와 무관세
의약품은 당초 미국이 국가안보와 자국산업 보호를 이유로 최대 100% 이상의 고율 관세를 부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합의로 의약품과 목재 제품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됐고, 항공기 부품, 복제약(제네릭), 미국 내에서 생산하지 않는 천연자원 등은 아예 무관세 품목으로 분류됐다.
제약산업의 돌발 리스크가 제거되면서 한국 제약사들의 미국 시장 진출 기반이 다져졌다. 다만 완전한 문서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한미 관세협상 타결로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자동차 관세도 25%에서 15%로 인하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일본과의 비교, 한국만의 독자적 성과
일본은 9월 4일 미국과 먼저 합의했고, 이 일본 딜이 한국 협상의 준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부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국이 일본과 유사하면서도 독자적인 안전장치를 더 많이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이 일본보다 더 확보한 조건들
•연간 투자 한도 200억 달러 명시 (일본에는 없음)
•상업적 합리성 조항 명시 (원리금 회수 가능한 프로젝트만 투자)
•현금 투자 규모 조정 (일본 5,500억 달러 대비 한국은 2,000억 달러로 36% 수준)
•조선 분야 1,500억 달러 별도 명시 (한국 기업의 조선업 진출 기회)
•마일스톤 방식의 분산 투자 (사업 진척도에 따라 단계적 투자)
•엄브렐라 SPC 구조 (여러 프로젝트를 하나로 묶어 손실 리스크 분산)
•한국인 프로젝트 매니저 선임 조항
•가산금리 상한 1.1%포인트 확보 (20년만기 미국 국채 금리 기준)
특히 일본에는 없는 연간 200억 달러 상한선 설정은 한국의 외환시장 특수성을 미국이 인정한 것으로, 협상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뤄진 부분이다. 당초 한국은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결국 연간 한도 설정이라는 현실적 대안을 끌어냈다.
원금 회수를 위한 다층적 안전장치
정부는 단순히 투자 약속에 그치지 않고, 원금 회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첫째, 상업적 합리성이 있는 프로젝트만 추진한다.
이는 투자금액을 충분히 회수할 수 있는 현금흐름이 보장된다고 투자위원회가 선의(good faith)에 따라 판단하는 투자만 한다는 의미다. 이 조항은 MOU 제1조에 명시될 예정이다.
둘째, 수익 배분 비율 조정 가능 조항을 확보했다.
원리금 상환 전까지 한국과 미국이 각각 수익을 5대 5로 배분하기로 되어 있으나, 한국이 20년 내에 원리금을 전액 상환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이면 수익 배분 비율도 조정 가능하다. 사업을 하다 보면 초기 3~5년간 현금흐름이 예상보다 더딜 수 있는데, 이 경우 한국에 유리하게 비율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높은 수익률 확보를 위한 금리 조건을 마련했다.
일본보다 110bp(1.1%포인트)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도록 가산금리 상한을 설정했고, 기준금리도 20년만기 미국 국채 금리를 적용했다. 같은 금액을 투자하더라도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다.
넷째, 엄브렐라 SPC 구조로 손실 리스크를 분산했다.
프로젝트를 여러 개로 나누되, 각각 별도 SPC(특수목적법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엄브렐라 SPC로 묶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사업에서 손실이 나더라도 다른 사업의 이익으로 보전할 수 있어 전체적인 손실 리스크가 크게 낮아진다.
2025 경주 APEC 정상회의 (PG)) ©연합뉴스
남은 과제와 향후 전망
이번 협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지만, 여전히 숙제는 남아 있다.
첫째,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다.
미국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철강·알루미늄에 대해 품목별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원재료뿐 아니라 변압기, 가전제품, 볼트, 너트 등 철강이 들어가는 400여 개 파생 상품에 50%의 관세가 적용된다. 이는 단순 무역 규제가 아니라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옮기라는 압박이다. 이 부분은 다음 협상에서 풀어야 할 핵심 과제다.
둘째, 관세 인하 발효 시기다.
일본은 MOU 서명 후 12일 만에 관세가 인하됐다. 한국은 MOU 이행을 위한 법률 제정이 필요하다. 대미투자 펀드 기금 신설, 정부 보증 발행, 운용 방식 등을 담은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해야 하며, 제출 시점이 속한 달의 첫날로 소급해 관세를 인하하기로 했다. 정부는 11월 중순까지 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셋째, 농산물 시장 개방 압박이다.
정부는 쌀, 쇠고기 등 민감 품목의 추가 시장 개방을 철저히 방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향후 추가 압박을 가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검역 절차 등에서의 양국 간 협력·소통 강화 정도로 합의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닐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한미 정상회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용외교의 승리,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
10월 29일의 극적 타결은 노딜 우려 속에서 이뤄낸 성과다. 막판까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이재명 정부는 국익을 우선하면서도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냈다.
특히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연간 200억 달러 상한선 설정, 상업적 합리성 조항 명시, 마일스톤 방식의 분산 투자, 엄브렐라 SPC 구조 등은 일본 딜에는 없는 한국만의 독자적 성과다.
일본과 같은 날 협상을 시작했더라도 일본이 확보한 안전장치는 모두 반영하면서, 추가로 한국의 외환시장 특수성을 미국에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협상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자동차 관세 25%에서 15%로의 인하는 현대차·기아 등 완성차 업체에 즉각적인 숨통을 틔워주었고, 반도체는 대만과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확보했다.
조선업 협력 1,500억 달러는 한국 조선 3사에 대규모 수주 기회를 열어주었다.
물론 한미 FTA 2.5% 특혜가 사라진 점, 철강·알루미늄 관세가 여전히 남아 있는 점, 농산물 추가 개방 압박 가능성 등 아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외환시장 안정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지켰다는 점에서 이번 협상은 '부분적 승리'를 넘어 '전략적 승리'로 평가받을 만하다.
앞으로 정부는 MOU 이행을 위한 법률 제정, 후속 협상을 통한 철강·알루미늄 관세 해결, 조선업 협력 조기 가시화 등의 과제를 풀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이번 협상에서 보여준 치밀한 준비와 전략적 협상력이 앞으로도 계속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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