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에 썩은 명리’는 시조시인 이은상이 작사하고 홍난파 작곡의 가곡 「금강에 살으리랏다」 속 구절이다. 본래 이 노래는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자연 속의 도(道)를 따르겠다는 선비의 초탈한 정신을 노래한다. 금강산의 맑은 물과 푸른 솔숲, 그 고요한 세계는 속세의 부귀와 명리를 초월한 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노래를 다시 떠올리면, 역설적으로 세속에 영혼을 팔아넘긴 예술가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권력의 향배에 몸을 맡기고 시대의 양심을 침묵으로 지운 채, 부귀와 안락을 예술의 이름으로 치장한 이들 말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예술은 종종 권력의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독재정권의 찬가를 부르고, 검열의 칼날 앞에서 침묵했으며, 때로는 그 칼날을 직접 휘둘렀다. 순수의 언어로 포장된 시와 노래가 폭력의 이념을 미화하고, 화폭 위의 붓이 억압을 은폐하는 데 쓰였다. 예술은 양심의 거울이 아니라, 권력의 거울로 기능했다.
‘금강에 살리라’고 노래하던 이들은 결국 금강산이 아니라 궁궐의 벽화 아래로 들어갔다. 붉은 먼지 속에서 썩어가는 명리(名利)에 연연하면서 그들은 스스로의 영혼을 저당 잡혔다.
정치인도, 학자도, 언론인도 아닌데, 언론의 중심에 서 있는 진중권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1월호=원광연 기자] 2024년 12월, 그리고 1940년 9월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시민들과 국회의 기민한 대응으로 친위쿠데타는 무위로 끝났다. 그날 밤, 배우 최준용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렇게 말했다. “계엄을 제대로 하시지, 몇 시간 만에 끝나서 아쉬웠다.”
가수 김흥국은 한발 더 나아갔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보다 제일 잘하고 계신다.” 아둔하게도 민주주의를 유린했던 독재자들의 이름을 칭송하며, 폭력을 미화했다.
배우 출신 유인촌 장관은 한예종을 폐쇄하고 정적들을 수감할 방안을 마련하며 내란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84년 전의 밤도 그러했다. 1940년 9월, 시인 서정주는 『국민문학』에 「마쓰이 히데오(松井英夫) 송」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같은 해 이광수는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조선인 학병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다. “황군에 지원하는 것은 조선 청년들에게 주어진 획기적인 대선물”이라고.
한국 현대사 100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예술인은 왜 권력에 부역하는가. 예술이 본질적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재구성을 요구한다면, 창의성이 변화를 지향하고 권위주의가 통제와 획일성을 추구한다면, 이 둘 사이에는 구조적 긴장이 있어야 한다. 유엔 특별보고관이 “예술가는 반대 담론과 기존 권력에 대한 균형추”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역사는 정반대를 보여준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4,389명 중 문화예술인이 174명, 교육학술인이 62명이었다. 이광수는 친일 작품 108편으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박정희 종신권력을 획책하며 만들어진 어용정당 유신정우회에는 대학교수와 학자, 언론인 등 지식인 150명이 대통령의 지명을 받고 ‘기꺼이’ 국회의원이 되었다. 김종필의 증언대로 “단 한 사람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는 9,473명의 예술인이 올랐다. 그렇다면 비밀리에 운영된 화이트리스트에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있었을까. 홍진에 명리를 구걸하는 것은 이미 우리는 오랫동안 목격했던 광경이다.
지난해 12월 계엄 그날부터 다수의 국민이 한겨울 추위 속에서 윤석열을 파면을 외칠 때에도 윤의 계엄을 옹호하고 나선 대표적 연예인 3인방. (좌부터 최준용, 김흥국, JK 김동욱) [사진_연합뉴스/JTBC 방송화면 갈무리l]
일제강점기, 청산되지 않은 출발점
1919년 3월 1일, 이광수는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집필했다. 그러나 20년 후,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가장 열성적인 협력자가 되어 있었다.
이광수는 친일 작품 108편으로 친일인명사전 문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문인들의 전시 동원을 주도했다. 1943년 도쿄 메이지대학에서 한 연설에서 그는 학병 지원을 ‘황국신민’의 의무라 역설했다. 1940년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며 조선이 일본을 통해 근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진심이었을까, 기회주의자였을까.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청산은 실패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쓴 지 8년 만인 1927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서를 편찬하는 기구였다. 3·1운동의 상징에서 역사 왜곡의 협력자로. 이보다 더 상징적인 배신이 있을까.
서정주는 1940년 「마쓰이 히데오 송」으로 가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했다. 해방 후에도 그는 반성하지 않았다. 1980년에는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 2000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 문단은 그를 ‘미당(未堂)’이라 부르며 거장으로 대접했다.
여류시인 노천명은 친일시 9편을 수록한 시집을 1945년에 발행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시집에서 해당 부분만 찢어내고 창호지로 붙여 재판매했다.
음악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는 일본군 위문공연을 다니며 국방헌금을 납부했다. ‘반도의 무희’ 최승희는 만주와 중국 전선을 돌며 일본군을 위문했다. 화가 김기창은 친일 미술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말년에야 반성을 표명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4,389명의 명단이었다. 문화예술인 174명, 교육학술인 62명. 그러나 이것은 해방 64년 만의 일이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와해되었다. 친일 청산은 실패했고, 도리어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 경제개발의 엘리트로, 문화계의 거장으로 아직도 불리고 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쓴 지 8년 만인 1927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독재시대, 부역을 시스템으로
해방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단절 없는 연속이었다. 친일 문인 모윤숙은 해방 후 반공 투사로 변신했다. 그는 ‘낙랑클럽’을 조직해 유엔 한국위원회 관련 미국 고위 인사들을 접대했고, 한국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반공 시를 썼다. 이념은 바뀌었지만, 권력에 대한 충성은 일관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예술인 부역을 개인의 선택에서 제도적 시스템으로 전환시켰다.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다. 박종홍을 비롯한 철학자, 교육학자 74명(기초위원 26명, 심의위원 48명)이 참여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개인의 발전은 국가의 융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국가가 개인보다 우선한다는 이 선언은 일제의 「교육칙어」를 모방한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독재자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정교화했다.
1973년 설립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유신 체제의 문화정책을 수행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예술인에 대한 지원과 검열을 동시에 수행하며, 정권에 순응하는 예술인에게는 특혜를, 비판적 예술인에게는 배제를 가했다. 문화 통제의 인프라가 구축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수백 명의 시민 위에 세워졌다. 그 학살을 은폐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것은 문화와 스포츠였다. 1981년 ‘국풍81’이라는 대규모 문화축제가 열렸다. 5·18 1주기에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기획이었다. 3S 정책(Screen, Sports, Sex)으로 정치적 관심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 국제 스포츠 행사를 통해 군부독재의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했다. 성공적인 올림픽은 학살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예술인과 체육인, 지식인들은 이 과정에서 ‘국위선양’이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민주화의 착시 - 끝나지 않은 부역
1987년 6월 항쟁은 군부독재를 끝냈지만, 지식인 부역의 구조를 해체하지는 못했다. 민주화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과거사 청산은 실패했다. 독재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학계, 예술계와 정치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2년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문화계 블랙리스트’였다. 이명박 정부 말기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이 작성되었고, 82명의 명단이 올랐다. 이것이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체계적인 탄압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2016년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정부가 무너지고,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났다. 김기춘, 조윤선, 우병우 등이 주도한 이 명단에는 9,473명의 예술인이 있었다. 전체 관리 대상은 21,362명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오스카상 수상 감독 봉준호,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배우 문성근 등이 포함되었다. 비판적 예술인에 대한 지원 배제, 사업 참여 금지, 조직적 감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공개되지 않은 ‘화이트리스트’였다. 정부는 의도적으로 이를 비공개했다. 영화진흥위원장 손진책 등 기관장들을 통한 사전 검열과 특혜가 이루어졌다. 동료가 동료를 검열하는 구조. 손진책은 영화인이었다. 그가 다른 영화인의 작품을 선별하고 배제했다. 화이트리스트 명단은 2024년 현재까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우리는 누가 협력했는지 모른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추진했다. 역사학계는 집필을 거부했다. 전국 70여 개 대학 사학과 교수들이 “역사학자로서 참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정부는 역사학자가 아닌 사람들을 동원했다. 최종 집필진 7명 중 역사학 전공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뉴라이트 인사 4명이 포함되었다. 실무를 주도한 인물은 권성연이었다. 그는 여론 조작에도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7년 국정교과서는 결국 폐기되었다. 그러나 권성연은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교육비서관으로 재임명되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문제를 일으킨 인물이 5년 만에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청산 없는 반복. 이것이 고질적인 한국 현대사의 구조다.
프랑스 철학자 줄리앙 방다(Julien Benda)는 『지식인의 배신(La Trahison des Clercs)』
예술인은 어떻게 권력의 나팔수가 되는가?
예술이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라면서 왜 이토록 많은 예술인이 권위주의 권력에 협력하는가. 이는 개인의 타락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현상이다.
1927년 프랑스 철학자 줄리앙 방다(Julien Benda)는 『지식인의 배신(La Trahison des Clercs)』을 출간했다. 그는 지식인의 본래 소명은 “진리와 정의에 대한 초연한 헌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정치적 헌신을 지적 소명으로 대체’하며 ‘당파적 편의가 진리보다 우선’하게 되었을 때, 배신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역설적이게도 방다 자신도 1930년대 공산주의를 옹호하며 자신의 원칙을 배반했다. 완벽한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다른 방식으로 이 현상을 설명했다. 그는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 개념을 제시했다. 모든 지배 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정교화하고 정당화하는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
유기적 지식인은 지배 계급에서 출현하여 그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확산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헤게모니(hegemony)’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피지배 계급의 ‘자발적 동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문화와 도덕, 정치적 의제를 변화시켜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국민교육헌장을 작성한 철학자들, 유신정우회에 참여한 학자들, 블랙리스트를 집행한 문화기관장들. 이들은 모두 권력의 ‘유기적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념을 생산했고, 국민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부역의 5단계 메커니즘
1단계: 구조적 조건 형성
권위주의 정권은 문화예술계를 통제할 수 있는 인프라를 먼저 구축한다. 소련은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Union of Soviet Writers)을 설립하고 비회원의 출판을 금지했다. 나치 독일은 괴벨스를 중심으로 ‘예술은 전쟁의 무기’라며 문화를 중앙 정치 도구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의 문화예술진흥원, 박근혜의 블랙리스트 시스템이 같은 역할을 했다.
2단계: 경제적 포섭
“생계가 걸렸다”는 말은 변명이 아니라 현실이다. 예술인들은 대부분 독립적 경제 기반이 없다. 정부의 지원금, 기금, 프로젝트에 의존한다. 소련에서 작가동맹 비회원은 출판할 수 없었고, 한국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인은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이광수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고, 유신정우회 의원들은 ‘금배지’를 얻었다. 흔히 경제적 의존은 정치적 복종으로 귀결된다.
3단계: 사회적 압력과 동조
“단 한 사람도 거절하지 않았다.” 김종필의 이 증언은 집단 압력의 힘을 보여준다. 소수가 저항하면 고립되고 배제된다. 박근혜 정부에서 손진책은 영화인이면서 다른 영화인을 검열했다. 동료가 동료를 감시하고 선별하는 구조. SNS 시대에는 이것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탄핵 찬성 예술인에 대한 집단 괴롭힘, 공연 취소, 불매운동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4단계: 이념적 정당화
부역자들은 스스로를 배신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념을 갖는다. 이광수는 ‘내선일체’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국민교육헌장은 ‘민족중흥’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2024년 계엄 옹호자들은 ‘반국가세력 척결’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이념은 변하지만, ‘더 큰 선을 위한 희생’이라는 논리 구조는 동일하다.
5단계: 헤게모니 생산
최종 단계에서 유기적 지식인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사회 전체에 확산시킨다. 이것은 단순한 선전이 아니다. 문화, 교육,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상식’을 바꾸는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한 세대 전체의 세계관을 형성했다. 88올림픽은 군부독재를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재포장했다. 국정교과서는 역사 인식을 바꾸려 했다. 성공하면 억압 없이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
희망22 동행포럼에서 특강하는 진중권 ©연합뉴스
엔터테인먼트형 정치 평론가, 보수 미디어는 “이 맛이야!”
지난 시절, 공개적으로 김건희와 윤석열을 옹호했던 진중권은 한국 정치 평론계에서 특이한 존재다. 그는 정치인도, 학자도, 언론인도 아닌데, 언론의 중심에 서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연예인처럼 엔터테인먼트 소속사(스카이피플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거의 유일한 정치 평론가라는 사실이다.
그는 1998년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로 조갑제를 비롯한 보수 지식인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진보 진영의 대표적 논객으로 자리 잡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촛불 시위에 참여했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 3위권에 올랐다고 본인이 밝힌 바 있다.
그런 그가 2021년 5월에는 윤석열 지지 포럼에서 기조발제를 하기도 했으며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 수사는 마녀사냥이라며 윤석열 정권 적극 옹호에 나서기도 했다. 뒤이어 김건희와의 개인적 교류도 상당 수준 이상이었음이 밝혀졌다.
‘희망22 동행포럼’ 창립총회에서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과 진중권 교수가 대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진중권은 즉각 ‘자폭테러’, ‘탄핵 사유를 만들어줬다’며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극우 유튜브 세계에 갇혀 현실감각을 상실했다’고 진단했고, ‘보수의 잃어버린 30년’을 경고했다.
진중권은 스스로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고 말한다.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이라는 것이다. 민주당도 권력이 되자 비판했고, 윤석열 정권의 초헌법적 폭거는 당연히 비판한다는 논리다. 일견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드러난 뻔뻔함이다. 진중권은 자신의 입장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적 일관성을 저버렸다. 민주당 비판에서 윤석열 지지 포럼 참여로, 다시 윤석열 비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그는 매번 “나는 변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변했다”는 무논리를 반복했다. 2019년에는 민주당이 변질됐고, 2024년에는 윤석열이 극우 유튜브에 포섭되었다는 식이다. 자기 입장의 변화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변명에 급급하다. 현재까지도 TV조선, 채널A 같은 극우 종편 방송들이 그를 패널로 앞다투어 초청하고 있다. 윤석열 비판을 하면서도 극우 종편의 단골 패널로 출연해 그들의 논리를 강화시켜주고 있다. 이들 종편은 진중권을 ‘전향한 진보 지식인’으로 포장하며 활용한다. ‘진보 진영에서도 민주당을 비판한다’는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이다. 출연료를 받고, 발언 기회를 얻으며, 극우 종편의 정당성 생산에 기여한다.
이러한 사례를 살펴볼 때 그의 발언은 독립적인 사유의 결과라기보다, 보수 레거시 미디어의 기획과 관리 아래 배포되는 콘텐츠로 기능하고 있는 것에 방점이 찍혀지고 만다.
이렇다할 정치적 경력도 학문적 성과도 없는 그에게 오로지 내세울거라곤 한때 ‘진보 진영’에 몸담았다는 점뿐이지만, 바로 그 점이 보수 언론의 입맛을 당기게 하는 지점이다. 보수는 언제나 ‘진보 출신의 반(反)진보 언사’를 최고의 전리품처럼 소비해 왔다. 진보 내부에서 이탈한 목소리는 ‘객관성’이라는 외피를 얻어, 보수 담론의 신뢰를 보정해주는 장치로 쓰이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그 장치의 대표적 사례다. 그의 비평은 더 이상 진실에 기반한 논평이나 공정의 잣대가 아닌 보수의 입맛에 맞게 조율된 ‘정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전락했음을 시사한다. 자극적인 언어, 인신공격성 풍자, 감정적 단언으로 구성되는 그의 단차원적인 레토릭이 오히려 보수 미디어의 알고리즘과 완벽히 호응한다.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대중문화교류위원회 출범식에서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과 K컬처 체험존 전시물을 관람하는 이재명 대통령 ©연합뉴스
정식 교수인가, 직함 장사인가? 평생교육원 ‘특임교수’
진중권이 속한 광운대학교 정보과학교육원은 얼핏 대학기관처럼 보이지만 정식 고등교육기관이 아니다. 사회교육원, 평생교육원처럼 수익을 내기 위해 사업자 등록증을 발행하고 부대사업을 진행하는 기관이다. 여기에서의 ‘특임교수’는 일반 대학의 전임교원이나 학문 연구자의 지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본래 ‘특임교수’는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단기 계약으로 초빙된 비전임 교원 제도다. 그러나 사회교육원이나 평생교육원에서는 이 제도가 종종 남발된다. 학문적 검증 없이 유명세만을 이용해 ‘교수’라는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기관을 홍보하고 인물의 발언 신뢰도까지 끌어올리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의 형태로 전락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이걸 모를 리 없는 레거시 미디어가 그를 지칭할 때마다 공들여 ‘진중권 교수’라 호명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가 특별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의 발언에 신뢰의 외피를 덧입히기 위한 미디어적 연출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 안에서 그는 ‘좌파 출신의 이성적 비평가’라는 이미지로 재포장되지만, 실제로는 보수 진영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관리형 스피커에 가깝다.
‘누가 더 듣보잡인가?’라는 진중권과 변희재의 오랜 논쟁은 이러한 구조의 희극적 단면을 보여준다.
보수는 이런 인물을 언제나 환영한다. 지난 대선 때의 심상정 후보처럼 진보진영 내부에서 한 발짝만 물러나 “윤석열이 대통령 되면 안 됩니까?” 같은 말을 던지는 순간, 즉시 주요 방송과 포털의 헤드라인에 오른다.
다시 금강에 살어리랏다
예술은 본래 진보의 편이다. 예술은 양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이광수가, 서정주가, 그리고 오늘의 관리형 스피커들이 그랬다. 사리사욕에 눈먼 예술과 지식은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권력을 돕는다. 총칼보다 위험한 것은 바로 그들의 말이다.
2024년의 내란 사태는 이런 부역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드러냈다. 예술인과 평론가, 언론과 학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또다시 권력의 편에 섰고, 침묵으로 동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민이 먼저 일어섰고, 국회가 헌법을 지켰으며,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지켜냈다. 이제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의 책무는 명확하다. 권력의 정당화를 돕는 지식의 타락을 끊고 예술과 언론, 학문이 다시 시민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제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예술은 진보의 편이지만, 양심을 잃는 순간 가장 교묘한 반동이 된다. 우리의 적은 총을 든 자만이 아니라, 권력에 무릎 꿇은 펜과 붓, 노래이다. 홍진에 썩은 명리로 얼룩진 부역의 역사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예술은 다시 삶의 자유와 세상의 진보를 노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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