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김세전기자] 1997년 1월 23일, 대한민국 경제사에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신화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한 날이다. 재계 서열 14위의 거함 한보그룹이 15억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 부도가 남긴 부실 대출 총액은 5조 7천억 원. 당시 국가 예산의 7%에 육박하는 이 천문학적인 금액은 한 기업의 방만한 경영이 낳은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업 총수의 탐욕을 축으로, 청와대 핵심 권력과 여야 정치권, 정부의 지시에 맹종한 금융권, 그리고 감시의 의무를 망각한 언론까지 가세한 거대한 '시스템적 공모'의 필연적 결과였다.
한보 사태는 1997년 11월, 대한민국이 국가 부도의 위기에 몰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 비극의 '도화선'이었다. 당시 '소통령'으로 불리던 대통령의 아들이 언론 보도까지 통제하려 했다는 정황("이것도 막아주시오")이 회자될 만큼 , 시스템 바깥의 비선 권력이 국정을 좌우하던 시대. 한보 사태는 그 비공식적 권력이 '금융'이라는 국가의 혈맥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한 증거다.
사태 발생 2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거대한 음모를 주도한 인물들과 조직, 그리고 그들의 탐욕이 어떻게 국가 전체를 나락으로 빠뜨렸는지 다시 복기한다.
1. 음모의 설계자: '로비의 귀재' 정태수와 당진제철소
모든 음모의 중심에는 '로비의 귀재'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있었다. 국세청 공무원 출신인 그는 정관계에 구축한 막강한 인맥을 바탕으로 재계 14위의 신화를 일궜다. 그의 마지막 야망은 총사업비 6조 원 규모의 당진제철소였다.
자기 자본 2,200억 원으로 6조 원짜리 사업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박이었지만, 정 회장에게는 '대마불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도 "1조 원을 빌려주면 10조 원 가치의 공장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는 '일단 짓기 시작하면 정부가 망하게 둘 수 없다'는 한국 경제의 불문율을 역으로 이용한 전략이었다. 그는 제철소라는 거대한 실물을 인질 삼아 국가 시스템 전체를 상대로 자금을 끌어들이는 판을 설계했다.
2. 음모의 조직: 청와대와 정치권의 '비호'
5조 7천억 원의 대출은 권력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 음모를 조직한 배후로 지목된 곳은 청와대와 정치권력이었다.
조직 1: 청와대 (비선 권력) 당시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는 모든 의혹의 정점에 있었다. 야당은 "청와대 2명, 신한국당 2명 등 여권 4인방"이 은행장들에게 직접 압력을 행사했으며, "이들의 배후에는 김현철이 있다"고 공세를 폈다.
이러한 '관치금융'의 실체는 청문회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한보 대출 실무 책임자였던 고(故)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는 은행장의 지시로 청와대 '윤진식 경제비서관'에게 2~3차례 직접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은행의 여신 결정이라는 고유 업무가 청와대의 '승인' 사항이었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증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현철 씨는 한보 사태와 관련한 직접적인 뇌물 혐의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별건인 알선수재 및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몸통'을 정면으로 치지 못하고, '조세포탈'이라는 법리를 동원해 사건을 봉합하려 한 사법부의 정치적 타협이라는 비판을 남겼다.
조직 2: 정치권 (입법 권력) 정태수의 로비는 여야를 가리지 않았다. 검찰 수사 결과, 대통령의 측근인 홍인길 신한국당(여당) 의원이 10억 원, 권노갑 국민회의(야당) 의원이 2억 5천만 원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국회의원의 직무는 포괄적"이라며, 소관 상임위가 아니더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에 뇌물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정태수 리스트'에는 33명의 이름이 올랐으나, 8명만이 기소되며 '꼬리 자르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3. 음모의 실행: '영혼 없는' 은행과 '관제' 보고서
권력의 비호는 금융권이라는 '행동대장'을 통해 실행되었다. 이철수, 신광식 전 제일은행장과 우찬목 전 조흥은행장 등은 기본적인 여신 규정마저 무시하며 한보에 돈을 쏟아부었다.
신광식 전 행장은 정태수로부터 4억 원의 뇌물을 받았으며, 이미 1996년 중반부터 한보가 회복 불능 상태임을 알았다고 시인했다. 이들은 권력의 외압과 뇌물에 포획되어 은행의 리스크 심사 기능을 스스로 마비시켰다.
이 '공모'는 기술적 사기극이기도 했다. 한보가 도입한 '코렉스(COREX) 공법'은 이미 포철(POSCO)에서 "심각한 설비 하자"와 "기술 미비"로 정부가 추가 사업을 포기시킨 기술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바로 그 시점, 동일한 기술을 한보가 도입하는 것을 허가하는 모순된 결정을 내렸다. 이는 청와대의 강력한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업은행과 한국기업평가 등은 "시장 전망 양호"라는 '관제 컨설팅' 보고서를 제출하며 이 부실 대출의 명분을 만들었다.
4. 비극적 파열: 한 실무자의 죽음과 '감시자의 침묵'
거대한 음모의 톱니바퀴는 결국 한 개인의 양심을 파괴했다. 1997년 4월 17일, 청문회에서 청와대 개입을 증언했던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가 11일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가족 외에, 그가 청문회에서 언급했던 '윤진식 비서관', '김원길 의원', '이철수 은행장' 등에게 "죄송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윗선'의 지시를 이행하고 '사실'을 증언했으나, 조직과 권력을 배신한 처지가 된 한 실무자가 윗선에 남긴 사과는 당시 시스템의 도덕적 파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박 상무의 죽음은 즉각 은행권의 '대출 기피증'을 불러왔고 , 이는 모든 기업의 자금줄을 마르게 하며 연쇄 부도의 방아쇠가 되었다.
이 거대한 유착을 감시해야 할 '언론' 역시 공범이라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한보가 관리하던 40여 명의 '언론인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혹이 파다했다. 한보 홍보실 관계자와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윤여준)까지 리스트의 존재를 시인하거나 언급했지만 , 검찰은 이 '성역'을 끝내 수사하지 않았다.
5. 붕괴의 도미노: 국가 부도의 그날
한보 사태라는 '도화선'은 10개월 만에 대한민국 경제 전체를 불태웠다.
1월 (한보 부도): 5조 7천억 원의 부실 채권이 금융 시스템을 강타했다.
3월~7월 (연쇄 부도): '대마불사' 신화가 붕괴하고 은행권 자금줄이 마르자 삼미, 진로 등 부채 의존형 대기업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7월 (기아 사태): 재계 8위 기아자동차의 부도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핵폭탄'급 충격을 주었다. 한국 기업과 정부의 신뢰가 공식적으로 파산한 순간이었다.
10월~11월 (외자 이탈):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키자 ,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단기 외채 상환 압박에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정부는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6. 결론: 책임지지 않는 공모자들
한보 사태는 명백한 '정·경·관·언 유착'의 총체적 범죄였으나, 그 책임은 불공평하게 돌아갔다.
주범 정태수 총회장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 5년여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또다시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해외로 도피해 법적 책임을 회피했다. 권력의 '몸통'으로 지목된 김현철 씨는 알선수재와 조세포탈로 처벌받았을 뿐이다. 불법을 지시한 윗선에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긴 실무자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모든 부패의 최종 비용은 IMF 관리체제 하에서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1997년 한보 사태는 한 기업의 실패가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가 어떻게 한 기업의 사기극에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준 부끄러운 기록이다. 2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거대한 음모의 고리가 과연 완전히 끊어졌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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