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전 우지파동


[시사의창=김세전기자] 36년전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기업 '삼양'의 20년 고난의 길을 만들었던 우지파동은 단순한 기업의 실수 혹은 비리가 아니라, 정·검·경(政檢經)이 유착되어 조직적인 움모론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건이기도 하며, 권력과 검찰에 대한 성찰과 개혁이 화두가 되어 있는 시점에서 대표적 사건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부: 1989년 11월 3일, 한 제국의 몰락

1989년 11월 3일, 대한민국 검찰청에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접수되었다.1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라면 업계의 맹주였던 삼양식품이 라면을 튀기는 데 "식용이 아닌 공업용 쇠기름(우지)"을 사용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수사를 지휘한 서울지방검찰청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검찰은 즉각 삼양식품을 비롯한 5개 식품업체의 대표와 임원 10명을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언론은 검찰의 발표를 대서특필했고,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검찰의 발표는 삼양식품에 대한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4 과학적 유해성 여부가 입증되기도 전에, '공업용'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삼양은 '국민 건강을 해치는 부도덕한 기업'으로 낙인찍혔다.4 소비자 불매 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 피해는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삼양식품은 3개월간 공장 가동을 멈춰야 했고, 시중에 유통 중인 제품은 전량 회수됐다. 당시 추산된 피해액만 4,000억 원에 달했다. 1,000여 명의 직원이 정든 회사를 떠나야 했으며 , 한때 국내 재계 순위 23위까지 올랐던 거대 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40%대에서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쳤다. 한국 최초의 라면을 만들었던 '원조'의 지위는 그렇게 무너졌고, 삼양은 농심과 오뚜기에 밀려 '만년 3등 기업'으로 전락했다.

2부: '공업용'이라는 낙인, 조작된 프레임인가

검찰 수사의 핵심 쟁점은 과연 삼양이 사용한 우지가 '공업용'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지점에서 검찰의 논리와 업계의 항변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검찰은 "공업용 우지는 아무리 정제 과정을 거쳐도 식용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원료 자체가 '비식용'이므로, 그 어떤 처리 과정도 불법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반면 삼양을 비롯한 식품업계는 "미국에서 '식용'과 '비식용'의 구분은 위생이 아닌 가격 등급을 정하기 위한 기준일 뿐"이라며 , "문제의 3급 우지 역시 고도의 정제 과정을 거치면 식용으로 사용 가능하며, 이는 미국 맥도날드 등에서도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반박했다.이는 과학의 영역이 아닌, '기준'과 '용어' 해석의 문제였다.

사건의 아이러니는 정부 부처 간의 엇박자에서 드러났다. 검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 지 불과 며칠 뒤, 식품 행정의 주무 부처인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해당 우지는 인체에 무해하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한 것이다. 이는 수사기관과 전문 행정부처가 정면으로 충돌한 이례적인 사건으로, 검찰의 수사가 '국민 건강'보다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훗날 밝혀진 과학적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다. 당시 논란이 된 우지의 포화지방산 비율은 약 43% 수준이었으나, 우지 파동 이후 라면 업계의 표준이 된 팜유의 포화지방산 비율은 약 50%로 오히려 더 높았다.

기나긴 법정 공방은 8년 뒤인 1997년 8월,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마무리되었다. 대법원은 "정제 과정을 거치면 식용으로 사용 가능하다"는 업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삼양식품에 최종 무죄를 확정했다. 검찰은 '유해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대신 '공업용'이라는, 대중에게 즉각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단어를 선택해 여론 재판을 유도했다. 보사부의 '무해' 판정에도 불구하고 구속 수사를 강행한 것은, 법리적 승리보다 '사회적 파장'을 노린 기획 수사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 사건이 삼양에 남긴 상처는 36년이 지난 2020년대에 극적으로 드러난다. '불닭볶음면'의 신화적 성공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삼양식품은, 창업주의 며느리인 김정수 부회장의 주도하에 '삼양1963'이라는 이름으로 '우지 라면'을 재출시했다. 김 부회장은 발표회에서 "잃어버린 명예의 복원" , "36년 만에 정직과 진심으로 제자리를 찾는 날"이라며 울먹였다.이는 단순한 신제품 출시가 아니라, 36년간 씌워진 '주홍글씨'를 씻어내고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한 기업의 명운을 건 '한(恨)'의 표출이었다.

3부: 반사 이익인가, 계획된 독주인가 (농심의 급부상)

우지 파동의 폭풍이 휩쓸고 간 라면 시장. 그 폐허 위에서 유일하게 웃은 기업은 농심이었다. 이 때문에 시중에서는 '농심이 경쟁사를 제거하기 위해 우지 파동을 기획했다'는 음모론이 수십 년간 파다하게 퍼졌다.

물론 농심 측은 이를 강력히 부인한다. 농심은 이미 1985년 '너구리', '신라면' 등 연이은 히트작으로 삼양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라선 상태였다는 것이 주된 반박 근거다. 또한 "우지 파동 당시 라면 시장 전체가 위축돼 농심 역시 매출이 30%가량 줄었다" 며, 1위 기업이 시장 전체를 박살 낼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농심이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설령 농심이 단기적인 매출 타격을 입었다 할지라도, 그 대가로 얻은 것은 훨씬 컸다. 유일하게 1위 자리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경쟁자이자 업계의 '오리지널'이었던 삼양식품이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이다. 삼양이 만년 3등 기업으로 추락하는 사이 , 농심은 대한민국 라면 시장의 '절대 강자'로 독주 체제를 완벽하게 굳혔다.

농심이 1위였다는 사실이 배후설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1위 자리를 굳히기 위해' 2위의 숨통을 끊을 동기는 충분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검찰의 수사는 농심에게 '시장 독점'이라는 거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검찰의 칼날이 농심의 기업 이익에 정확히 복무한 '결과적 공범' 관계라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4부: 칼을 든 사람: '공안 검사' 김기춘

그렇다면 1989년, 이 무리한 수사를 지휘한 검찰의 최고 책임자는 누구인가. 바로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이다.

김기춘은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8년 12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제22대 검찰총장으로 재직했다. 우지 파동(1989년 11월)은 정확히 그의 재임 기간 한가운데에 터졌다. 그는 유신헌법 초안 작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이며, 5공 시절 잠시 '소외'되었다가 노태우 정부의 '5공 비리 청산' 수사를 지휘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의 별명은 '미스터 법질서'였다. 그는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등을 처리하며 노태우 정부의 '공안 정국'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우지 파동은 이러한 김기춘 식 '보여주기 수사', '공안 통치'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른다. 당시 검찰은 민주화 세력과 운동권을 탄압하며 '정권의 시녀'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정권과 검찰 조직을 향한 국민적 불신을 뒤집을 '큰 사건'이 필요했다. '먹거리'라는 민감한 이슈, '대기업'이라는 타깃, '공업용'이라는 충격적인 키워드는 대중의 여론을 장악하기에 완벽한 조합이었다.

주무 부처인 보사부의 '무해' 판정을 묵살하고 수사를 강행한 것은, 이 수사의 목적이 법리나 과학적 사실 규명이 아닌, '여론 장악'과 '정치적 효과'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양의 몰락은 수사의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검찰 권력의 성과를 극대화하고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본보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5부: 정권의 노림수: 왜 1989년 11월이었나

수사 시점은 더욱 절묘하다. 1989년은 6월 항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태에서 '5공 비리 청산'과 '광주 문제'가 정국을 뒤흔들던 시기였다.노태우 정권은 출범 2년 차에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었다.

특히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 6월 서경원 의원의 밀입북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정권은 극심한 이념 대립과 안보 위기론에 휩싸였다. 정권은 민주화 요구와 통일 논의를 억누르기 위해 강력한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1989년 4월,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가 계엄에 대비해 민간인 923명의 체포 계획('청명계획')을 수립했을 정도였다.

'우지 파동'은 바로 이 시점, 즉 5공 청문회와 방북 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이 바닥에 떨어진 1989년 11월 3일에 터졌다. 이는 정권의 위기를 덮기 위한 고도의 '국면전환용 카드'였다는 가설에 힘을 싣는다.

'간첩'이나 '좌익'은 일부 국민에게만 위협적이지만, '유해 식품'은 전 국민의 공포를 즉각적으로 자극한다. '우지 파동'은 '공안 탄압'이라는 정치적 비판을 '민생 안전'이라는 사회적 이슈로 완벽하게 덮어버렸다. 이는 국민의 불만을 기업으로 돌리고, '국민을 보호하는 검찰' 이미지를 구축하려던 노태우 정권과 김기춘 검찰의 합작품, 즉 '민생 버전의 공안 통치'였던 셈이다.

6부: 보은(報恩) 논란: 김기춘, 왜 농심으로 갔나

시간이 흘러 1989년의 수사와 2008년의 취업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며, '우지 커넥션'의 실체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김기춘 전 검찰총장은 검찰총장직(1990년 퇴임)과 법무부 장관직(1991~1992년), 국회의원(1996~2008년) 을 거친 뒤, 2008년 돌연 ㈜농심의 비상임 법률고문으로 취업한다.2013년까지 5년간 재직한 그는,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놀라운 점은 그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인 2016년 9월, 또다시 농심의 법률고문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사회는 '보은(報恩) 논란'으로 들끓었다. 1989년, 농심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삼양식품에 치명타를 입힌 수사의 최고 책임자 3를, 그 최대 수혜자인 농심이 수백만 원의 급여를 주며 고문으로 영입한 것이다. 농심 측은 "신춘호 당시 회장과 김 전 실장이 동향(경남 울산) 출신이며, 바둑이라는 취미가 같아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 이라고 해명했지만, 대중의 의혹을 불식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공교롭게도 2016년 하반기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정국을 휩쓸던 시기였다.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한 여론이 최악으로 치닫자, 농심에 대한 불매운동 조짐까지 일었다.결국 김 전 실장은 2016년 12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자진 사임 형식으로 물러났다.

1989년의 수사가 공정한 법 집행이 아니라 농심에게 '선물'을 안겨준 행위였으며, 2008년과 2016년의 고문 위촉은 그에 대한 '대가'였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은 이 사건의 본질을 관통한다. 다음 타임라인은 이 30년간의 연결고리를 명확히 보여준다.

7부: 결론: 36년 만의 '사필귀정', 그러나 승자는 따로 있었다

삼양식품은 1997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고, 36년 만에 '우지 라면'을 부활시키며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외쳤다. 법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그들은 '조작된 수사'의 피해자였음을 입증해냈다.

그러나 시장의 정의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우지 파동으로 경쟁자가 쓰러진 시장에서 농심은 지난 수십 년간 흔들림 없는 '라면 제국'을 유지했다. 시장의 승자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정점에 섰던 인물. 1989년의 검찰총장 김기춘은 훗날 법무부 장관을 거쳐 그 최대 수혜 기업의 법률고문이 되었고, 나아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권력의 정점에 섰다.

'우지 파동'은 단순한 식품 안전 스캔들이 아니었다. 이는 정권의 위기를 덮으려는 정치권력, 충성심을 증명하고 조직을 장악하려던 검찰 권력, 그리고 시장 독점을 노린 자본 권력이 교묘하게 얽힌 '정·검·경(政檢經) 유착'의 추악한 교본이다. 36년 만에 돌아온 우지 라면의 고소한 냄새 뒤에, 한국 현대사의 씁쓸한 뒷맛이 가려져 있다.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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