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탐사취재팀] 1999년 2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발생한 강도치사 사건. 사건 발생 9일 만에 체포된 세 명의 청년은 17년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다.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의 총체적 실패를 보여준 '삼례 나라슈퍼 사건'의 전말을 추적했다.
가난하고 배움이 짧았던 세 청년
임명선(당시 20세), 최대열(당시 19세), 강인구(당시 19세) 씨.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이들은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의 표적이 됐다. 특히 최 씨와 강 씨는 지적 장애를 앓고 있었다. 강인구 씨는 한글을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의 이름으로 작성된 자술서는 매우 길고 논리적인 문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거짓말하면 산에 파묻어 버린다"고 협박하며 폭행을 가했다. 2010년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폭행과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공식 확인했다. 자백은 피의자들의 기억이 아니라 경찰관들이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 적은 것에 불과했다.
묵살된 진실, 조작된 증거
현장에 있었던 생존 피해자는 "범인들이 뚜렷한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전라도 출신인 세 청년은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결정적 증언은 처음부터 무시됐다.
현장검증 역시 조작됐다. 피해자의 사위가 개인적으로 촬영한 영상에는 형사들이 "네가 했잖아, 빨리 해봐"라며 범행 동작을 지시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영상은 17년 후 재심의 결정적 증거가 됐다.
세 청년은 작은 드라이버로 문을 따고 침입했다고 자백했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피해자를 결박한 테이프에서 지문이나 DNA를 채취하는 기본적인 감식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이들과 관련된 어떤 물리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진범의 자백마저 묵살한 검찰
1999년 10월, 대법원은 세 청년에게 징역 3~6년형을 확정했다. 살인 사건임에도 1심부터 대법원까지 불과 7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초고속 재판이었다.
그런데 유죄 확정 직후인 1999년 11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부산지방검찰청에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부산지검이 수사한 결과, '부산 3인조'가 범행 일체를 상세히 자백했다. 경상도 사투리 사용, 범행 도구 등 모든 정황이 일치했다.
하지만 부산지검은 사건을 전주지검으로 이송했고, 전주지검은 이 사건을 '삼례 3인조'를 기소했던 바로 그 최성우 검사에게 다시 배당했다. 자신의 판단을 스스로 뒤집어야 하는 극심한 이해상충 상황이었다.
예상대로 최 검사는 2000년 7월, 진범들의 자백에 신빙성이 없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명백한 증거를 의도적으로 묵살한 것이다.
17년 만의 무죄, 그러나 끝나지 않은 싸움
2015년, 진범 중 한 명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자백했다. 그는 억울하게 수감된 세 청년을 직접 찾아가 용서를 구했고, 숨진 피해자의 묘소에 무릎을 꿇었다.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가 사건을 맡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진범의 증언과 조작된 현장검증 영상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2016년 10월 28일, 전주지방법원은 재심 공판에서 세 청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17년간 크나큰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은 피고인들과 그 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례적으로 사법부를 대표해 공식 사과했다.
2021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국가와 최성우 전 검사에게 총 15억 6,50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최 전 검사의 '중대한 과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불법 수사에 가담한 경찰관과 검사 중 누구도 형사 처벌이나 징계를 받지 않았다. 2018년 대검찰청 진상조사단마저 "검사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 '소년들'로 재조명
이 사건은 최근 설경규 주연의 영화 '소년들'로 재조명되며 다시 한번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는 억울한 옥살이의 현실과 무너진 사법 시스템의 민낯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결코 우연한 예외가 아니다. 실적주의에 사로잡힌 수사 관행, 폭력으로 자백을 제조하는 수사 권력, 조직 보위에 급급한 검찰, 국가의 서사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사법부. 이 모든 것이 결합해 만들어낸 구조적 참극이었다.
17년 만에 되찾은 무죄 판결. 하지만 빼앗긴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제2, 제3의 삼례 사건을 막기 위해 우리 사법 시스템은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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