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연합뉴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일본에서 보수 정치의 상징이자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 사나에(64) 자민당 총재가 제104대 일본 총리로 공식 선출됐다. 여성으로서는 사상 최초의 일본 총리다. 21일 일본 국회에서 총리 지명 선거가 끝난 뒤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회견 내용 중 일부는 뜻밖의 표현으로 일본 안팎의 주목을 끌었다.

다카이치는 1961년 일본 나라(奈良)현에서 태어났다. 교토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방송국 리포터로 일하다가 미국 워싱턴 D.C.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보수 사상을 굳혔다. 귀국 후 1993년 중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해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 초년기부터 그는 자민당 내에서도 유독 보수적 노선을 걷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여성 정치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국방과 헌법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의 인연은 이 시기에 시작됐다. 아베는 다카이치의 정치적 멘토이자 ‘정신적 스승’으로, 두 사람은 ‘강한 일본’을 지향하는 안보관을 공유했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은 다카이치를 ‘여자 아베(女アベ)’라고 부른다.

다카이치는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두 차례 직접 참배했다. 정치적 부담을 무릅쓴 행보다.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일본인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랬던 다카이치 총리가 당선 후 웃음을 머금은 채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우려가 있는 것 같지만, 나는 한국 김을 정말 좋아한다.” 이어 “한국 화장품도 사용하고 있고, 한국 드라마도 보고 있다”며 돌연 부드러운 제스처를 보였다. 이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유화적인 메시지처럼 들렸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전략적 ‘톤 조절’로 해석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강경보수로 분류되는 다카이치 총리가 이런 식의 대중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가 과거 여러 차례 보여왔던 배타적 민족주의적 언행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다카이치는 정치적 성장 과정에서 ‘아베 신조의 후계자’를 자처해왔다. 경제 정책, 헌법 개정, 안보 강화 등에서 아베 전 총리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며 자민당 내 강경 보수파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여자 아베’라는 별명도 이런 이유에서 붙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두 차례 참배한다. 2002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8월 13일 야스쿠니를 참배한 것을 두고 “당당히 종전일인 8월 15일에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선 1995년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반성한 무라야마 담화를 비판하며 “총리가 멋대로 대표해서 사과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2022년 극우단체 주관 강연에서는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간에 그만두는 등 어정쩡하게 하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당시 그는 “총리가 돼도 (야스쿠니를) 참배하겠다”고도 했다. 이 발언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외교 감각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불러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다카이치 총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빠뜨리지 않고 참배한 인물”이라며 “한국 언론은 그를 ‘강경보수’로 규정하며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정세 앞에서 ‘전략적 절제’ 택한 듯

하지만 총리 취임 후 첫 회견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이전과 다른 어조를 보였다. 그는 “한일 관계의 중요성은 한층 더 커지고 있다”며 “정권 간에 구축된 관계의 기반 위에서 미래지향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이는 일본 우익 정치인이 흔히 사용하는 ‘미래지향’이라는 추상적 표현을 넘어, 관계 유지의 필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는 “북한 대응을 포함한 안보 측면에서 한국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언급했다. 이달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언급하며 “이재명 대통령과 만날 기회를 기대한다”고 말한 부분은 양국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다카이치의 이 같은 발언이 국제정세 속 일본의 현실적 외교 노선을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불안, 미중 패권경쟁 등 복합 위기 속에서 일본은 한국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대북·대중 전략의 균형을 잃게 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중국 외교부 제공


다카이치 총리 당선에 中 노골적 경계심

중국 관영매체들이 일본의 새 총리로 취임한 다카이치 사나에를 향해 노골적인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통상적으로 주변국 지도자 교체 시 외교부 명의의 축하 메시지를 내지만, 이번에는 다카이치 총리에게만 이례적으로 공식 축하를 생략했다. 이 같은 조치는 중국이 다카이치를 잠재적 ‘반중 강경파’로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중국 신화통신 산하의 시사 계정 ‘뉴탄친(牛彈琴)’은 22일 게시물에서 “우리가 좋아하든 말든 일본 총리가 또 바뀌었다. 이제는 다카이치 사나에”라며 “세상은 트럼프 하나로도 충분히 피곤한데, 이제 ‘여성판 트럼프’가 등장했다”고 비꼬았다. 이어 “다카이치는 일관된 반중 인사”라며 “남경대학살을 부정하고, 중국 위협론을 퍼뜨렸으며, 대만 문제에서도 거듭 도발적 발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뉴탄친은 다카이치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참배하고, 일본 자위대를 군대로 전환하는 개헌을 주장해 온 점을 문제 삼았다. 게시물은 “그녀의 정치적 행보는 일본 우익의 상징과 같다”며 “이런 인물이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중국에 있어 매우 불편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 매체는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견해이며, 공식 입장은 아니다”라고 덧붙였지만, 동시에 중국 외교부가 다카이치 취임에 대해 아무런 축하 발언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교 채널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은 것은 중국이 일본 새 정권과의 초기 관계 설정에서 ‘거리두기 전략’을 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 내부에서도 다카이치의 취임은 향후 중·일 관계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변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카이치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한 인물로, 과거 “총리가 되어도 야스쿠니 참배를 이어가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또 중국의 군사력 확대를 ‘아시아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대만 문제에 대해 미국과 보조를 맞춰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베이징의 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은 다카이치를 ‘예측 불가능한 정치인’으로 본다”며 “그녀의 취임은 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시키는 한편, 중·일 외교의 긴장을 다시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결국 다카이치 내각의 출범은 일본 국내 정치의 우경화를 상징함과 동시에, 동북아 정세의 또 다른 갈등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선거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내 유력 경쟁자였던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을 제쳤다. 고이즈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으로, 당선될 경우 일본 최초의 부자(父子) 총리 사례가 될 뻔했다.

고이즈미는 2019년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 문제를 펀(Fun)하고, 쿨(Cool)하고, 섹시(Sexy)하게 다뤄야 한다”고 발언해 ‘펀쿨섹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청년층에게 높은 인기를 얻었지만, 경험 부족과 당내 기반의 한계로 결국 다카이치에게 밀렸다.

이번 선거 결과는 자민당 내 세대교체보다 ‘정통 보수의 재부상’을 의미한다는 평가가 많다. 다카이치는 아베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내 구 주류 세력을 결집시키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다카이치 총리의 유화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관계 개선의 제스처처럼 보이지만, 한일 관계의 근본적 갈등을 해결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의 역사 인식이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일본의 첫 여성 총리이자 국제사회에서 주목받는 지도자로서 현실 외교의 복잡한 계산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한 일본 외교 소식통은 “다카이치 총리가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과의 갈등을 완화하며 실용 노선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며 “하지만 국내 강경보수층의 압박을 동시에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다카이치 사나에의 첫 행보는 일본 보수정치의 변화를 상징한다. ‘야스쿠니’의 그림자와 ‘김(海苔)’의 미소 사이에서, 그는 아베 신조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스스로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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