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일 오전 코스피 지수가 외국인과 기관의 동반 매수세 속 2% 가까이 상승하며 한때 3890선도 넘어섰다. 오전 10시 현재 3,850~3,900 사이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AI가 이끄는 새로운 산업 질서 속에서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확산과 데이터센터 투자의 폭증이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끌어올리며, 업계에서는 10년 만에 찾아온 ‘슈퍼사이클’이 이미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급은 한정된 반면, 수요는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국내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대의 핵심 공급자로 떠오르며 세계 시장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이번 반도체 호황의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가 있다. 생성형 AI 모델의 등장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의 출현이 아니라, 데이터 처리와 저장의 규모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거대한 언어모델을 학습시키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의 양은 과거보다 수십 배 이상 많아졌고, 이에 따라 서버용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AI 연산의 핵심 부품인 GPU와 더불어 HBM(고대역폭 메모리), 그리고 범용 D램이 동시에 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범용 D램 DDR4 8Gb 제품의 현물 가격은 최근 8달러를 돌파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5달러 초반대에 머물던 가격이 단기간에 50% 이상 상승한 것이다. 9월 말 기준 고정거래가격은 6.3달러로 2019년 이후 6년 만의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문가들은 서버와 데이터센터용 수요가 생산 여력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가격 상승세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서버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하며, 특히 구형 공정 제품의 가격 상승 폭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이번 슈퍼사이클이 과거와 다른 점은 ‘구조적 성장’이라는 데 있다. 과거의 반도체 호황은 대체로 단기적 경기 순환에 따라 1~2년가량 지속되다 재고 누적과 가격 하락으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산업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 AI는 특정 산업군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전 산업의 근본을 재편하는 기술로 자리 잡았다. 금융, 헬스케어, 제조, 콘텐츠 산업 모두 AI를 기반으로 데이터를 생성·활용하고 있으며, 그 데이터가 결국 메모리 반도체를 통해 저장·처리된다. 여기에 미·중 기술 패권 경쟁으로 인한 장비 수출 제한, 신규 공장 건설의 지연 등 공급 측 제약이 겹치며 가격 상승세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이번 메모리 슈퍼사이클은 2027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이전과 같은 재고 중심의 경기순환형 사이클이 아니라, 구조적 수요 증가에 따른 장기 성장 국면”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반등이 아니라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읽힌다.

SK하이닉스 사상 첫 영업이익 '10조 클럽'이 예상되는 가운데,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미소짓고 있다./연합뉴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전망도 밝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4분기 영업이익은 12조1317억 원, SK하이닉스는 12조4954억 원으로 예상된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86.8%, 54.6% 증가한 수치다. 삼성전자는 이미 3분기 반도체 부문에서 12조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달성했다.

삼성전자는 현재 평택과 화성, 시안 공장을 중심으로 AI 특화 메모리 라인을 강화하고 있다. 차세대 D램과 HBM 생산라인을 확대하며 엔비디아, AMD,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IT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 중이다. SK하이닉스는 HBM3E 양산을 앞당기며 AI 시장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특히 엔비디아의 최신 GPU 제품군이 SK하이닉스의 HBM을 채택하면서 기술 경쟁력 측면에서도 독보적인 입지를 굳혔다.

하나증권 김록호 연구원은 “AI 연산 수요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며 “메모리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가격 상승과 수익성 개선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사이클은 단기적 반등이 아니라 장기적 수요 확장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세계의 시선도 다시 ‘메모리 코리아’로 향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칩스법(CHIPS Act)을 추진 중이지만, 첨단 메모리 부문에서는 한국 기업을 대체할 대안이 없다. 반면 한국은 HBM과 D램 양산에서 글로벌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며, AI 인프라의 근간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메모리의 기술력은 이제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국가 안보와 전략산업의 핵심 축으로 인식되고 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삼성전자 제공


전문가들은 이번 슈퍼사이클이 단순한 가격 상승기가 아니라 ‘메모리 르네상스’의 서막이라고 진단한다. AI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이상, 데이터를 저장하고 이동시키는 메모리는 인간 사회의 새로운 에너지와 같다. AI는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지만, 그 지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담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반도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제 단순한 제조기업이 아니라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는 기술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AI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0과 1’의 흐름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그들의 기술력은 전 세계 산업의 동맥이 되고 있다. 업계는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 슈퍼사이클은 끝이 다르다.” 과거의 반도체 호황이 경기의 파도였다면, 이번은 기술이 만든 대륙이다. AI와 반도체가 함께 그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한국은 그 심장부에 서 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시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