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이재명 대통령(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강대국의 바람이 바뀔 때, 가장 먼저 흔들리는 나라는 늘 중간에 낀 나라다. 역사는 이를 무수히 증명해왔다.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마다 주변국들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고, 때로는 줄을 잘못 서서 사라졌다. 고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그랬고, 20세기의 냉전 질서가 그랬다. 그리고 지금, 미·중 패권경쟁의 시대에 그 역사는 다시 반복되고 있다.

한국의 외교적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미국의 압박을 무시하기 어렵고,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단절할 수도 없다. 한국의 수출 중 약 20%가 여전히 중국으로 향하고,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기술·장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버리는 선택은 곧 경제적 타격과 외교적 고립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중 갈등의 본질은 단순한 패권다툼이 아니다. 기술과 자원의 주도권을 둘러싼 ‘21세기 산업 전쟁’이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인공지능, 우주산업을 중심으로 ‘자국 중심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고, 중국은 이를 ‘봉쇄’로 간주하며 자체 기술 자립에 나섰다. 두 나라 모두 상대 진영의 기술·부품·자본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이런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진행될수록, 한국처럼 글로벌 가치사슬 한가운데 있는 나라는 더 큰 불확실성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한국이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선택’이 아니라 ‘주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한쪽을 택하는 순간, 다른 쪽의 압박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이 독자적 기술력과 산업 기반을 강화해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가 된다면, 두 강대국 모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바이오 등에서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 분야를 국가적 전략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공급망 다변화와 핵심소재 국산화, R&D 투자 확대를 통해 기술 주권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외교적 측면에서도 균형의 감각이 필요하다. 미국 중심의 안보 협력은 강화하되, 중국과의 실리 외교를 병행해야 한다. 경제·기술 협력은 현실적 파트너십으로 유지하되, 외교 의제에서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동맹은 미국, 시장은 중국’이라는 구식 구호를 넘어, 한국이 스스로 협력의 조건을 설계할 수 있는 ‘다극적 외교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 인도, 유럽, 동남아 등과의 전략적 연대도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결국 한국의 생존력은 국력에서 나온다. 내부적으로는 내수시장 확대, 산업구조 혁신,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통해 자생적 기반을 다져야 한다. 외부적으로는 ‘중간국 네트워크’를 구축해,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대를 주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중견국 외교의 모범사례로 남을지, 아니면 또 하나의 완충지대 국가로 소모될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역사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진다. 강대국의 대결 속에서 작은 나라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답은 언제나 같다. 남의 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이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줄타기가 아니라, 주도다.

미중 충돌 사이에서 압박받는 한국 산업


오늘날 세계는 영토를 놓고 싸우던 시대를 넘어, 관세·자원·기술·금융이 뒤엉킨 복합전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군사 충돌 대신 경제 제재가, 외교 담판 대신 공급망 전쟁이 국가의 생존을 결정한다. 각국은 어느 쪽 진영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려 하지만, 두 거대한 블록의 압력은 점점 더 직접적이고 거칠어지고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안보 협력을 강화하며, 중국은 ‘경제적 보복’이라는 그늘로 대응한다. 거대한 힘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중견국들은 외교적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현실이 되었다. 멕시코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중국산 전기차에 50% 관세를 부과했고, 인도는 베이징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미국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양쪽의 불신만 키웠다.


냉전 시대처럼 ‘한쪽에 서면 보호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구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미국도, 중국도 이제 ‘우호국’에게 비용 없는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기준으로 동맹을 시험하고, 상대 진영과의 충돌을 감수하라고 요구한다.

이 현실 속에서 한국은 앞서 언급했듯이 미·중 경쟁의 최전선에 놓였다. 미국은 안보를 내세워 대규모 투자를 압박하고, 중국은 경제를 무기로 맞서고 있다. 미국은 한국 기업에 약 3천500억 달러(약 50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요청하며 ‘경제 안보 동맹’을 강조한다. 반면 중국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를 제재 명단에 올리며 경고장을 날렸다.


이 거대한 압박 속에서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넘어섰고, 수출은 줄고 수입 물가는 치솟았다. 국제질서의 격랑은 곧바로 기업과 가계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단순한 ‘줄서기’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생존 전략은 어느 한 진영에 기댄 충성심이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중국은 내수시장과 희토류를, 일본은 소재·부품·장비의 기술력과 엔화를 무기로 삼는다. 한국도 반도체, 배터리, 조선 등에서 압도적인 기술우위를 확립하고, 공급망을 다변화해 특정 진영의 인질이 되지 않아야 한다. 미·중 양국이 “한국 없이는 곤란하다”고 인정하는 분야를 확보하는 것이 진정한 자주 외교의 출발점이다.

역사는 강대국의 발자취보다, 그 틈새에서 살아남은 나라들의 선택을 더 오래 기억한다. 줄을 잘 서는 기술이 아니라, 스스로 중심을 잡는 힘이 생존을 결정짓는다. 지금 한국이 마주한 현실은 2천 년 전의 정나라나 위나라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결말만큼은 다르게 써야 한다. 강대국의 그늘이 아니라, 독자적 힘으로 버티는 ‘한국식 줄타기 외교’가 필요한 이유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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