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인 독도가 미군의 폭격 훈련 연습지역으로 처음 지정된 것은 한국의 군정기였던 1947년 9월 16일의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인 SCAPIN 제1778호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SCAPIN 제1778호는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내린 지령으로 일본의 혼슈 서부 해안 거주자들과 시마네현 오끼섬(隱岐島) 주민 등에게 폭격 훈련 사실을 사전에 통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도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조업하는 한국 어민들에게는 어업활동 금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 후 1951년 7월 6일에 내린 명령인 SCAPIN 제2160호에도 일본 어민들에게만 독도 폭격 훈련을 15일 전에 통보하라고 되어 있었다.
`60년 아픔' 간직한 독도 바다 밑 폭탄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0월호=홍성룡 독도간도역사연구소 소장] 1946년 1월 29일에 SCAPIN 677호에 의해서 이미 독도가 일본의 행정 관할구역에서 제외된 상황이었다. 독도의 주권이 일본에 귀속되지 않는다고 명문화한 지령이다. 또 1946년 6월 22일의 SCAPIN 제1033호에 의해서 일본 어선과 어부들은 독도 주변 12해리 이내 수역으로의 접근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독도 근해에 위의 지령에 의해서 일본 어선들의 조업은 금지되었지만, 한국 어선들의 조업 활동은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정부조차도 미군의 폭격 연습지역으로 독도가 지정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한국 어민들의 조업 활동 제한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도가 폭격 훈련 장소로 지정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주된 이유는 독도가 동해의 한복판에 있어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장거리를 비행한 후에 폭격을 가하는 훈련에 적절하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평양으로의 소련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 독도가 군사 안보적 차원에서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지정학적 요소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독도를 폭격 훈련 장소로 지정한 후 1948년 6월 18일과 1952년 9월에 15일, 22일, 24일 등 총 4차례에 걸쳐 독도 근해에서 폭격 훈련을 감행하였다. 그 폭격으로 한국 어민과 선박에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주었다.
전시 상태도 아닌 지역에서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으로 인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다치고 목숨을 잃은 한국의 어민들이 많았다. 혹자는 미군에 의해 한국 어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77년이 지난 2025년까지도 사건의 진상규명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가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바람에서 사건을 간단하게 조명해보려고 한다.
“독도 맹폭 사건 어데로, 민족의 분격 절정에”란 제목으로 미군의 1차 독도 폭격 사건을 보도한 경향신문(1948년 6월 15일)
1. 1차 독도 폭격 사건
미군의 1차 독도 폭격 사건은 1948년 6월 8일 화요일,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국 극동 공군사령부(Headquarters of Far East Air Force) 제5공군의 B-29 슈퍼포트리스 9대가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독도 부근서 훈련 중에 독도를 폭격하였다. 미 공군 폭격 기대인 제93중 폭격 비행단(93rd Bombardment Group) 소속이었다. 오전 11시 30분 경이었다. 독도 근해에 4차례에 걸쳐 500kg 폭탄 76개를 투하하고 기관총 사격도 하였다.
이때 독도 주변에는 한국의 강원도와 울릉도 어선 30여 척이 고기를 잡거나 미역을 채취하는 등의 조업을 하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조업 현장은 아비규환으로 변하였고 당연히 큰 피해가 뒤따랐다. 어선 20척이 파괴되었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게 된 사건이다.
사고가 일어난 10일 후인 1948년 6월 19일 자 동아일보에는 “독도 해역에서 고기를 잡거나 미역을 따고 있던 어부들이 정체불명의 전투기로부터 폭탄과 기관총의 집중포화를 받아 어선 1척이 파괴되고, 어부 14명이 즉사하였으며,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전투기는 미국 극동항공대 사령부 소속의 B-29 전투기로 판명되었다”라고 보도되었다. 당시 일부 언론보도에는 어부 14명이 즉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생존자들은 최소 80여 척의 어선이 파괴되었고, 배 한 척에 5명에서 8명 정도의 어부가 조업을 하고 있었기에 최소 150명 이상의 어부가 살상되었다고 주장하였다.
2000년 울릉문화에 실린 홍성근의 ‘독도 폭격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서’에 나오는 일부 내용을 편집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8년 6월 8일 화요일 오전 11시경 비행기 소리가 났다. 정찰하는 비행기라 생각하며 어민들은 하던 일을 계속하였는데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독도로 접근하더니 갑자기 폭탄을 투하하였다. 한 차례의 폭격과 기관총 난사가 있었고 그로 인해 독도 주변 수역에서 조업하던 선박이 파괴되고 어부들과 해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배 위에 있던 어민들은 바다로 뛰어들었고, 독도 주변 바위에서 미역과 전복을 채취하던 해녀들은 암벽 사이로 급히 몸을 피하였다.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인임을 알렸지만 헛수고였다. 이곳저곳에서 어민들이 졸지에 무참히 죽어갔다. 팔이 잘려 나가고 몸통에서 피가 솟구쳤다. 초록빛 독도 바다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하였다. 독도는 순식간에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렸다. 당시 독도 근해에서 조업 중이던 배는 최소 30여 척, 최대 80여 척이었는데 그중에서 적어도 30여 척은 침몰하였다. 한 척당 5명에서 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150명에서 24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사건은 독도 폭격 사건 가운데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1차 독도 폭격 사건 당시 울릉도에 신문기자들이 시찰차 체류하고 있었기에 독도 폭격 사건을 접한 기자들이 즉시 기사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통신 사정이 좋지 않아 사건 발생 3일 만인 6월 11일에 처음으로 폭격 사건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단독 기사가 나왔다.
그 이후로 모든 국내 신문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1948년 7월 말까지 독도 폭격 관련 기사가 480여 건이나 되었다. 특히 UP와 로이터 등 해외 통신사들도 기사를 타전하였고, 미국의 1948년 6월 11일에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처음으로 독도 폭격 사건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성조지(Stars and Stripes), 워싱턴포스트 등 해외 언론들도 독도 폭격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하였다고 한다.
미군정청은 사건 발생 8일이 지나도록 독도 폭격 사실 등을 부인하였다. 그러다가 극동 공군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 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하여 연습 폭격을 했다고 발표하였다.
폭격기가 고공에서 훈련하였기에 어선과 바위를 구별하지 못하였고, 폭격 30분 후에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을 분석하였더니 현장에 작은 선박 여러 척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하였다.
“어민의 희생에 민족적 의분 격발!”이란 제목으로 미군의 1차 독도 폭격 사건을 보도한 조선중앙일보(1948년 6월 16일)
미국 극동 공군사령부가 밝힌 1948년 6월 16일 독도 폭격 사건과 관련한 조사 결과 발표문이다. “현장 촬영 사진을 심사한 결과 독도 근해에 있던 조그마한 어선들은 B-29 폭격기의 고도 폭격 연습을 할 때 바위로 보였던 것이 판명되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 기지를 출발한 B-29 폭격기대가 폭격을 가하기 30분 전에 정찰기가 6회나 독도 부근인 북위 37도 15분과 동위 131도 45분 지점을 시찰하고 연습에 무방하다는 것을 보고하였던 것이다. 현지 부근에는 폭격 대상이 될 많은 작은 섬이 있는 만큼 이 어선들도 섬으로 보였던 것 같다. B-29 폭격대는 2만3000 피트인 약 7,000m 상공에서 연습탄을 투탄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해상에서 아무런 선박도 보지 못하였다고 보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폭격 30분 후에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에 의하여 이 위험 지역 구내에 다수의 작은 배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정식 조사가 끝나는 대로 완전한 보고를 상급 사령부에 제출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미군은 확인이 된 것도 사고 책임을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엉성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피해자들의 증언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미군이 의도적으로 공격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B-29 폭격기가 기관총을 이용해 목표물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행위인 기총소사도 있었는데, 피해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한국 국민도 미군이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추후 미군 당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하여 울릉도와 독도에서 피해 내용을 조사하였다고 하면서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배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배상 내용이나 독도를 미군의 폭격 훈련대상으로 지정했던 배경이나 경위, 민간인 희생자 발생에 의한 폭격 사건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미군 내의 책임자 처벌 수준 등 구체적인 내용은 일절 공개되지도 않았다. 당시 포항에 주둔하던 미 육군의 장교 몇 명이 울릉도에 가서 사고 피해를 조사하고 배상 문제 등을 처리했다고 소문만 무성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잘 파악되지도 않았고 또 알려지지도 않았다.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서 독도의용수비대의 홍순칠 대장이 쓴 자서전 내용은 진실 여부와 별개로 정말 충격적이다. 미성년자에게는 300환과 어른은 500환의 위자료를 지급했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에 미국 돼지 1마리 값과 비슷한 가치에 불과하다고 홍대장은 질타하였다. 동맹국이라 믿었던 미국의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는데도 형식적인 사과와 얼토당토않는 배상으로 사건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2. 2차 독도 폭격 사건
미군의 2차 독도 폭격 사건은 1952년 9월 15일에 발생하였다. 9월 15일 오전 11시경 미 극동 공군사령부 소속의 폭격기가 독도 상공에 출현하여 독도를 몇 차례 선회한 뒤에 4개의 폭탄을 투하하고 일본 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당시 독도에는 어민 23명과 해녀들이 소라와 전복을 따기 위한 조업 중이었는데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이었다. 어민들은 독도 인근 해역에 군사 훈련에 따른 출어 금지나, 미군의 연습 폭격 목표로 독도가 지정된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조업에 나섰는데도 폭격이 발생하자 매우 불안해하였다. 일본 시마네현 어민들에게는 독도 폭격 훈련에 의한 사전 통보와 경고가 내려졌지만, 한국인 어민들에게는 독도 근해에 군사 훈련으로 인한 어업 금지나 미군의 폭격 훈련과 관련해서 아무 내용도 통보받지를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2차 독도 폭격 사건에서는 한국 어부들의 인명피해가 전혀 없었다.
1952년 9월 21일 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울릉도 통조림 공장 어선인 광영호는 선원 9명과 해녀 14명을 태우고 독도로 출어 중이었다. 갑자기 미군 B-29 폭격기 1대가 나타나 4발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 위력은 강력하였는데 1948년 6월 8일 1차 폭격에 이어 또 폭격 사건이 일어나 지금 독도는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인명피해는 없었다”라고 보도하였다.
“독도에 또 폭격 연습! 22일 쌍발기 4대가”라는 제목으로 2차 독도 폭격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1952년 9월 25일)
3. 3차 독도 폭격 사건
미군의 3차 독도 폭격은 1952년 9월 22일에 발생하였다. 1945년 9월 15일에 설립한 한국산악회가 울릉도와 독도에 학술조사단을 파견하고 있던 때였다. 한국산악회가 1952년 8월 15일에 ‘독도는 한국령’이라는 표지석을 제작하여 독도에 세우려고 계획했었다가 미루어졌고, 그해 9월 15일, 22일, 24일 한국산악회 조사단이 독도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한국산악회 학술조사단 일행 36명이 예정보다 늦은 9월 18일에 울릉도에 도착하였고, 9월 22일에 독도로 학술조사 활동을 위해 출발하였다. 조사단이 22일 오전 11시경 독도 부근에 도착했을 때, 미 공군 B-29 폭격기 4대가 갑자기 나타나서 독도 해상에 폭탄을 투하한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한국산악회 학술조사단은 독도 조사를 포기하고 울릉도로 돌아와야 했다. 일본이 폭격 연습지로 재지정한 독도에 미군이 실제로 폭격을 가하는 것을 학술조사단이 직접 목격하였다. 당시 산악회 부회장과 학술조사단장이었던 홍종인 조선일보 기자는 즉시 정부 관계기관과 언론사에 통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9월 24일에도 미군에 의해 4차 독도 폭격이 한 차례 더 이루어졌다. 4차에 걸쳐 이루어진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은 미군의 훈련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인 어부들을 밀수꾼으로 둔갑시켜 그들을 사살하는 게 목적이었다는 주장도 존재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노린 일본의 로비와 술책으로 미국과 연합국을 흔들었기에 발생 가능한 사건이란 것이다. 진상규명이 시급한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4. 한국 정부의 대응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0년 4월 25일에 한국 정부는 미군정기간 내에 일어난 1948년 6월 8일의 1차 독도 폭격 사건에 대하여 미 제5공군에 공문을 보내 질의하였다. 미 공군으로부터 1950년 5월 4일에 공식적 회답을 받았다. 당시에 독도와 그 근해에 어민들의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었다는 것, 독도가 미군 극동 공군의 훈련 목표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아주 형식적인 내용이었다. 생업을 위한 조업 활동 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한국 어민들만 졸지에 희생을 당한 것이다.
1952년 11월 10일에 한국 외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1952년 9월에 발생한 2차, 3차, 4차의 독도 폭격 사건에 대한 항의 문서를 보냈다. 폭격 사건에 대한 미군의 조사 내용을 알려 줄 것과 한국 영토인 독도 폭격 사건의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약 2개월이 지난 뒤였다. 한국 정부의 항의에 미국은 1952년 12월 4일에 공식적으로 답변을 하였다. 사건 발생 후 시간이 많이 지나서 사건에 관한 내용을 알 수가 없으며, 또 독도의 한국 영유권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성의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미 공군 사령관은 독도가 미 공군을 위한 훈련기지 선정에서 제외되었다는 답변을 하였다. 1948년 6월 8일의 1차 독도 폭격 사건에서 한국 어민들이 인명과 재산피해를 엄청나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 12월까지도 독도가 미 공군의 폭격 훈련기지 선정에서 해제가 되지 않았음을 자백한 것이었다. 당연히 미 공군의 연습 목표로 독도가 선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미군의 기존 답변은 명백한 거짓이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미 공군에 의한 독도 폭격 사건은 무고한 한국 어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지금이라도 한 점 거짓 없는 모습으로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따져 바로 밝혀야 할 것이다. 진상규명과 별도로 동맹국인 미국의 횡포와 만행으로 국제적인 논란을 남긴 사건으로 세계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미국이 한국 정부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한국 정부는 그동안 진상규명이나 미군의 사과, 배상에 대해 매우 소극적으로 임했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도 않았다. 이제라도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발 벗고 뛰어야 한다.
1차 독도 폭격 사건 2주년인 1950년 6월 8일에 동도 몽돌 해안에서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미군 폭격으로 인한 희생자이므로 ‘독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비’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첫번 째 독도 폭격 사건이 발생한지 2주년이 되는 1950년 6월 8일 독도 동도의 몽돌해안에서 열린 '조난어민위령비' 제막식에서 우리 해군 병사들이 조총을 쏘고 있다.
5. 일본 정부의 대응
일본의 외무성은 미 공군의 독도 폭격이 있기 전부터 독도가 미군의 폭격 훈련지로 지정될 것을 요청해 왔다. 일본 의원들은 죽도(다케시마, 독도)는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반환해야 할 영토이기에 그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세워달라고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분위기였다.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인 일명 미일 상호방위조약은 1951년 9월 8일에 체결되고 일본이 국권을 회복한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었다. 그 조약 제3조에는 ‘미합중국의 군대의 일본 국내 및 그 부근에 있어서 배치를 규율하는 조건은, 양 정부 간의 행정협정으로 결정한다(The conditions which shall govern the disposition of armed forc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and about Japan shall be determined by administrative agreements between the two Governments)’는 내용이 있다. 일본은 이 조약에 기초한 미일 행정협정 제2조에 따라서 미·일은 1952년 7월 26일 해상연습 및 훈련구역으로 독도를 지정하였다고 하고, 일본의 외무성이 7월 26일 자로 외무성 고시 제34호를 통해서 공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군이 독도를 폭격 훈련 장소로 지정한 것은, 미국이 죽도(다케시마,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있는 증거라고 일본은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할 작정으로 일본 정부는 미군이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계속 사용할 것을 희망했던 것이다. 미국을 동원하는 술수를 짜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18일에 우리나라 연안수역 보호를 목적으로 독도를 포함하는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였다. 이 선언이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을 둔다고 밝혔기에 일명 ‘평화선’이라 불리었다. 평화선을 선언하자 일본 정부는 평화선이 선언된 지 1주일 만인 1월 24일 성명을 발표하며 반발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을 부추겨서 미군이 2차로 독도를 폭격 실행하도록 기획했다고 보는 것이 매우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이승만 평화선에 불복하며 평화선을 무력화시키려고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했다고 알려졌었다.
그중에 하나가 1952년 7월 26일에 독도를 주일 미군의 폭격 연습지 지정 절차를 통해 일본은 독도 영유권의 상황 반전을 도모하였다. 일본은 미군의 독도 폭격 훈련 과정에서 미·일 합동위원회를 통한 행정절차 협의를 했다는 점을 들어, 미국에 의해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설사 미국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하더라도 독도가 일본 영토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까지도 미국의 2차 독도 폭격 사건을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 근거로 뻔뻔스럽게 이용하고 있다.
6. 한국의 재발 방지 요청
한국 정부가 독도 폭격 사건 직후에 다각적으로 사태 파악을 마치고 1952년 11월 주한 미국대사관에 독도 폭격 재발 방지를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미국은 1952년 12월 4일에 앞으로는 독도에 폭격 훈련을 하지 않겠다고 한국 정부에 알려왔다. 일본 정부에는 그런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이 한국 정부에 독도 폭격 연습을 중지하겠다는 통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1953년 2월에 한국 국방부가 관련 내용을 언론에 공개한 이후에야 일본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 발표는 한국 정부와 UN군 당국이 합의한 사항이었고, 미국 극동 공군사령부도 한국의 국방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서 그 내용을 보장했었기에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일본으로서는 매우 당황스럽고, 가장 받아들이기 싫은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이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고 인정해 줄 것을 학수고대하며 미군의 독도 폭격 훈련을 도모하고 지원했었는데, 오히려 미국이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손을 들어 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4차례의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에서 한국 어민들에게는 너무나 큰 희생과 피해가 발생했으나,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이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배상 등은 제대로 된 것이 없었는데, 당시 독도 폭격 사건을 수습해 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공식적으로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으로 관보에 실린 ‘평화선’ 지도(1952.1.18)
7. 독도 폭격 사건과 한국의 접근 대응 전략
일본의 독도 침탈과 도발, 주장에 대해 한국이 효과적으로 접근 대응하는 전략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대칭적 접근 대응 전략이다. 독도와 관련된 일본의 도발이나 침탈에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대응하는 것이 대칭적 접근이다. 초중고 교과서 도발, 죽도(독도)의 날 기념식 강행, 방위백서와 외교 청서에서의 사실 왜곡, 죽도(독도) 문제 10가지 POINT 등 일본의 억지 주장에 대해 일본의 국민에게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똑똑한 답변을 한국이 제시하는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최근 일본은 1877년의 태정관 지령이나 각의 결정에 대하여 새로운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일본은 태정관 지령을 통해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님을 분명히 했었기에, 일본의 논의에 이끌려 다니지 말고 강하게 정면 대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비대칭적 접근 대응 전략이다. 일본의 도발과 침탈 전략에 매몰되지 말고 한국이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한국이 담론을 주도해가는 것이 비대칭적 접근일 것이다. 일본이 불리하거나 숨기고 싶어 제기하지 않거나 못하는 새로운 과제를 발굴해서 논의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과제와 사료를 발굴해야 성공할 수 있다. 한국이 독도에 대해 실효적 영유를 하고 있음을 최대한 활용하여 실효적 지배강화 정책의 수립과 시행은 비대칭적 접근에서 일본보다 우위를 점할 것은 분명하다. 일본의 독도 분쟁화 시도에 동요하거나 휘말리지 않고 독도에 대한 영역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1948년 6월 8일에 발생한 미군의 1차 독도 폭격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짐짓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1차 독도 폭격 사건에서 어로 활동을 하던 한국 어민들에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 그 자체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독도 근해가 한국 어민들의 생활 터전임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독도 폭격사고 수습 과정에서 한국의 울릉도 구조대는 물론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으로 사고가 발생한 독도 현지에서 구조활동을 했었다는 점,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 24군단 사령부가 특별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한 점 등에서 1차 독도 폭격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것은 한국이 비대칭적 접근으로 논의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
셋째는 통합적(hybrid) 접근 대응 전략이다. 대칭적 접근과 비대칭적 접근을 목적과 상황에 따라 적절히 조합해서 융합적으로 활용하여 대응할 수 있다. 정면 접근 대응, 조용한 접근 대응, 적극적 접근 대응 등도 적절하게 섞어 대응하는 통합적 접근이 있을 것이다. 교활한 일본의 독도 도발이나 침탈에 대해서 대체적으로는 통합적 접근 대응 전략으로 상황과 변수 등을 적절히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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