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국회 법사위에서 국민의힘 곽규택 의원이 원로급 박지원 의원에게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사별한 부인에 대한 물음이었다. 동료의원의 죽음마저 정치 공세의 도구로 삼는 비인간적인 면모와 무지성에 자리한 다른 의원들도 일제히 “먼저 사람이 되라”며 나무랐다. 그런데 이 곽규택 의원의 친형은 <억수탕> <친구> 등으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 곽경택이다. 지난해 말 개봉한 그의 작품 <소방관>은 동생 곽 의원의 행보에 따라 흥행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윤석열을 옹호하고 탄핵을 반대하면서 갖은 극우적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친형은 분명 계엄은 잘못된 것이고 윤석열 탄핵에 찬성하면서 동생과는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밝혔다. 한 핏줄에서 나왔지만 이러한 극명한 대비는 오래된 질문을 소환한다.
2024년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결의를 촉구하는 문화예술인과 단체 2차 시국선언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시사의창 2025년 10월호=원광연 기자] 예술은 왜 언제나 권력의 반대편에서 진보의 편에 서는가?
이러한 사례는 박정희와 그의 형 박상희의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형 박상희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면서 문필가였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영남의 사회주의 세력의 거두로 활동할 만큼 급진적 좌파였다. 동생 박정희는 혈서를 쓰면서까지 일본육사에 입학하고, 만주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가담했다. 해방 후에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탈취해 반공을 국시로 삼으며 종신독재를 획책한 파시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같은 집안에서 탄생한 두 갈래의 길, 권력과 예술의 갈등은 사실 우연이 아닐 수 있다.
진보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진보’의 본질부터 짚어야 한다.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론 멈춰 서서 우리가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이고, 때론 당연하게 여겨온 길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진보의 핵심은 ‘질문’에 있다. 신의 이름으로 왕이 통치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 않은가’라고 물었던 계몽주의자들의 질문, 소수의 자본가가 부를 독점하는 현실에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던 마르크스의 질문처럼 말이다.
진보는 기존의 질서, 권위, 상식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려는 역동적인 활동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집단의 광기에서 개인의 이성으로, 복종에서 자유로, 혐오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려는 인간 정신의 위대한 투쟁의 산물이다.
예술은 왜 진보와 닮았는가?
“우리가 지금 걷는 길은 옳은가, 규칙은 모두에게 공정한가, 소외되고 상처받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진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태도다. 그런데 예술 또한 이러한 태도와 맥락이 닿아 있다.
예술의 본령인 창의성의 핵심은 ‘상투성’의 해체에 있다. 습관적 익숙함을 혁파하고, 당연함을 낯설게 만들어 감각을 재정립 시킨다. 브레히트가 몰입을 일부러 방해하고 관객을 ‘깨어 있는 판단’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경함은 사람으로하여금 사고를 작동시키게 만들고, 그러한 사고의 발현은 늘 권력에게 눈에 가시처럼 작용했다.
20세기 독일의 혁신적인 극작가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연극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그가 보기에, 관객이 주인공의 운명에 함께 울고 웃으며 감정적으로 완전히 빠져드는 전통적인 연극은 현실의 문제점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다고 보았다.
브레히트는 이러한 기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감정적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배우가 갑자기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무대 장치가 다 보이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것은 현실이 아닌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는 관객이 등장인물에 동화되어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대신, 한 걸음 떨어져 무대 위 상황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관객을 감상자가 아닌 ‘깨어 있는 판단’을 내리는 이성적 주체로 끌어올리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현실을 이처럼 ‘낯설게’ 바라보게 되면, 관객은 ‘왜 저런 부조리가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고’의 힘이야말로 주어진 질서를 시민이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는 권력의 입장에서는 가장 불편하고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얼마나 시민을 각성시켜 왔는지 한국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971년 발매된 김민기 1집 표지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시인 김지하의 풍자시 <오적>은 단순한 시를 넘어 권력의 심장을 찌른 사건이었다.
재벌·고위관료·군 장성을 ‘도적’이라 부른 그 언어는 군사정권의 역린을 건드렸고, 사형까지 언도 받았다. 언어가 곧 무기였음을 보여준 사례다.
1980년대 판화가 오윤은 목판 위에 민중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그의 판화로 만든 걸게그림은 거리를 가득 채운 분노한 민중의 선언문이 되었고, 광장의 함성이 되었다.
김민기의 노래 <아침이슬>은 처음엔 단순한 서정가요로 불렸지만, 권력은 그것을 체제에 대한 도전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금지곡이 된 노래는 오히려 확산의 촉매가 되었고, 이 노래는 오히려 ‘제 2의 애국가’가 되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멤버로 활동했던 김광석의 목소리 또한 민주화 운동에 박차를 가하며 전진하는 심장박동 소리처럼 들려졌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칼날이 장악했던 시절, 진실을 향한 예술의 저항은 지하에서 더욱 치열하게 타올랐다.
권력이 가장 필사적으로 은폐하려 했던 광주의 진실은 ‘몰래 보는 영화’들을 통해 세상에 고발되었다. 영화 <부활의 노래>는 금기였던 5·18을 정면으로 다루며 시민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역사의 상흔을 상기시켰다.
노동 현장의 참상도 고발되었다. 영화 창작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파업전야>는 노동자의 투쟁을 생생하게 그리며 당국의 상영 금지 조치에 맞서 전국의 대학과 공장 등지에서 ‘게릴라 상영회’를 이어갔다.
비록 1989년이지만,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구로 아리랑>도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며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이 단순한 재미를 주는 것을 넘어 억압받는 민중의 현실에 대한 자각과 감동을 안겨주면서 사회를 진일보시키는데 앞장섰다.
미학의 흐름으로 살펴보는 예술의 진보적 본성
예술이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생각은 비단 최근에 나타난 일이 아니다. 이러한 통찰은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궁구(窮究)되었고 발전해왔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예술을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 즉 ‘원본의 그림자를 베낀 그림자’라고 하면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진리에서 두 단계나 멀어져 대중을 현혹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경계심이 시사하는 바는 예술이 얼마나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 서구 철학은 오랫동안 ‘이성’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했다. 이러한 흐름의 정점에는 근대 합리주의의 문을 연 르네 데카르트가 있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모든 진리에 대한 해석을 ‘이성’에 두었고,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했다. 오직 이성적 사유만이 확실한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논리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만이 진리였고,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은 불완전하고 저급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예술은 이성적 진리를 꾸미는 장식품이거나, 대중을 가르치는 도덕적 수단에 머물러야 했다.
미학의 탄생
이러한 흐름에 균열을 낸 것이 18세기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텐이다. 그는 그리스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 감각적 지각)’에서 착안해 ‘미학(Aesthetics)’이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아직도 미학이 어떤 학문인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은데, 미학이란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규명 체계와 이론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바움가르텐은 “감각적 인식 역시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진리”라고 주장하며 이성의 독재에 맞섰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감각적 세계를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미학의 탄생은 예술이 더 이상 이성의 하위 요소가 아니라, 고유한 진리를 탐구하는 독립적 영역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바움가르텐의 토대 위에서 철학자 칸트는 ‘예술의 자율성’을 선언하며 예술을 종교나 권력의 시녀 역할에서 완전히 해방시켰다.
20세기에 들어 메를로퐁티는 예술이 우리의 관성적 시각을 깨고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거두, 자크 데리다는 예술에 단 하나의 정답은 없으며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보았고, 푸코는 예술을 ‘권력의 감시(판옵티콘)’를 역으로 해체하는 ‘저항의 시선’으로 파악했다. 결국 미학의 탄생과 그 이후의 철학적 흐름이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예술은 세상을 오직 이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증명한다. 인간은 이성뿐 아니라 감각과 감정, 그리고 다양한 해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예술은 그러한 다양한 이해 방식의 편에 서서 기존의 질서와 고정된 관념을 흔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바로 이 점이 미학을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핵심적 의미다.
1982년 생전의 미셸 푸코(왼쪽)와 철학자 알랭 핑켈크로트
질문하는 예술, 낙인 찍는 권력
예술이 감각을 해방시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질 때, 권력은 언제나 그것을 불편해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히틀러와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희화화였지만, 그 여파로 채플린은 미국에서 ‘좌파’로 낙인찍혀 사실상 추방당했다.
예술이 사회적 양심으로 현실을 비추는 순간, 권력은 그 빛을 체제 전복의 신호로 오해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한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일도 유사하다. 이명박 정권 초기, 광우병 파동 당시 배우 김규리(개명 전 김민선)는 국민 건강을 우려하는 짧은 발언 한마디 때문에 방송과 영화계에서 퇴출당하다시피 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예술에 대한 탄압이 권력에 의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를 집약해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가 세월호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한 부산국제영화제에 전방위적으로 압력을 행사한 사실을 입증한 김희범 전 문체부 차관 작성 문건 ©연합뉴스
정부에 비판적인 예술인 수만 명의 명단을 작성해 지원에서 배제하고 창작활동을 방해한 행위는, 예술을 권력의 장식품으로 만들려는 충동이자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적대 행위였다. 이는 윤석열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극우적 권력과 예술의 불화는 필연적이다. 극우의 언어는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단순함으로 대표되며 우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배제를 추구하지만, 예술의 본질은 모호함과 다층성을 끌어안는 복잡성에 있기 때문이다.
2014년 부산시가 부산국제영화제 주최 측에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의 상영을 취소하고 압력을 행사한 사건이나, 최근 내란 사태 직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통제·휴교 조치를 당한 일은 권력이 예술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하고 통치 편의의 도구로 삼으려 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같은 가지지만 서로 다른 길을 가야하는 숙명
이러한 대립은 때로 한 가족 안에서 비극적 서사로 드러나기도 한다.
중국 후한 말, 권력의 화신이었던 조조가 죽은 뒤에 벌어진 형제간의 비극처럼 말이다. 황제가 된 형 조비(曹丕)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동생 조식(曹植)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압박했다.
그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칠보시’ 일화는 유명하다. 조비는 조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형제에 관한 시를 짓게 하고 그러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게다가 형제라는 말이 들어가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칠보시(七步詩)’를 지어 위기를 모면했다.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대를 태워 솥 안의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솥 속의 콩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구나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 같은 뿌리에서 함께 태어났거늘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하게 들볶는가
권력의 칼날이 가장 가까운 혈육마저 겨누는 비정함과, 그 서슬 퍼런 압박 속에서 피어난 예술적 성과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야기다.
곽경택, 곽규택 형제와 박상희, 박정희 형제의 사례에서 보았듯, 권력과 예술은 결국 서로를 향해 시위를 겨누는 숙명을 지닌다. 권력은 기존 질서를 사수하려 하고, 예술은 질문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최근 유인촌 장관의 행보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여 씁쓸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예술가 출신에서 완전한 정치인으로 변모한 그는 내란 사태에서 반역자들이 정적들을 감금하기 위해 한예종을 통제하려 했다는 ‘내란 동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그의 아들인 남윤호는 영화 <서울의 봄>에 출연해 한국 민주화의 여정을 재연했다. 비록 일반화할 수 없는 작은 사례지만, 아버지는 권력의 편에 섰고, 아들은 예술을 통해 권력을 향한 질문자가 된 단면을 발견한다.
박근혜 정부 한-불 수교행사 블랙리스트 사건 조사결과 브리핑에서 진상조사위가 입수한 문건 ©연합뉴스
예술가들의 용기, 잊지 말아야
결국 예술이 진보의 편에 서는 것은 숙명이다. 상투성을 깨고, 인간의 존엄을 일깨우며, 타인에 대한 공감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극우의 언어는 단순화와 혐오, 배제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 하며 예술을 쓸모없는 장식품으로 취급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블랙리스트 사건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될 국가적 수치이며, 예술에 대한 외압은 표현의 자유를 겨눈 반헌법적 폭력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예술이 단지 피해자로만 머물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특히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순간,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먼저 광장으로 나섰다.
박근혜 탄핵 때는 유아인, 이준, 김동완(신화), 김미화, 차인표, DJ DOC, 이승환, 전인권, 양희은, 안치환, 크라잉넛, 노브레인, 조PD 등 678명에 달하는 예술인들이 직접 집회에 참여하고 무대에 올라 촛불의 열기를 더했다.
최근 윤석열 탄핵 운동에서는 방식이 한 단계 더 진화했다. 김의성, 이원종, 고민시, 신소율, 안예은 등 많은 예술인들이 직접 광장에 섰고, 여기에 더해 SNS와 팬 커뮤니티를 통한 간접 연대라는 새로운 흐름을 보여줬다. 아이유, 소녀시대 유리, 박찬욱 감독, 그룹 뉴진스 등은 집회 참가자들을 위한 식음료 선결제 릴레이나 응원 메시지를 통해 마음을 보탰다. 이는 팬덤과 시민의 자발적 연대가 결합된 새로운 저항의 모습이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가수 이승환의 윤석열 탄핵 촛불문화 공연 [촛불행동TV 유튜브 화면 갈무리]
소수의 예술인이 권력에 부역하고 야합할 때, 가수 이승환은 혹한의 무대에 올라 민주주의를 노래했고 배우 정우성, 문성근 등은 각자의 자리에서 계엄의 부당함에 맞서며 연대를 이끌었다. 이들의 용기는 불의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예술적 실천이었다.
내란의 상처를 봉합하는 길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사태 수습에도 있지만, 열린 감각과 길게 숨 쉬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내란 세력에 저항했던 우리 시민들은 추운 광장에서 형광봉으로, K팝으로 그것을 온몸으로 뜨겁게 보여줬다.
서로 다른 경험을 수용하고, 모호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며,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 예술은 이 태도를 훈련 시키는 가장 신뢰할 만한 장치다. 정치가 세상을 곧장 바꾸지 못할 때,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바로 그 ‘사람’을 바꾼다.
내란의 주모자를 법정에 세우는 것만으로 무너진 공동체를 온전히 재건할 수는 없다. 불신과 혐오가 남긴 폐허 위에 다시 신뢰를 쌓고 연대의 감각을 복원하는 일, 그 중심에 바로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의 용기 있는 공헌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술이 세상을 직접 구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예술은 언제나 파괴가 아닌 창조의 편에, 절망이 아닌 희망의 편에 서 왔다. 그것이 예술이 언제나 진보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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