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이믿음기자]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은 한글문학 기획전을 열고 있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고려인 한글 문학의 불꽃을 다시 밝히는 자리다.

이 가운데 한 세기 전 중앙아시아 거센 바람 속에서도 한글로 세상을 기록했던 편집자들의 헌신이 가슴을 울리고 있다. 이들은 다름아닌 언론인 남해룡(1902–1973), 송진파(1914–1990), 김국천(1913–1989}이다.

이들은 신문의 행간과 서적의 활자 속에 민족의 숨결을 새겨 넣으며, 망명지에서도 한글과 정체성을 지켜낸 ‘펜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남해룡(1902-1973), 송진파(1914-1990), 김국천(1913-1989)

1937년, 스탈린의 명령 한 줄에 연해주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다수는 생존을 위해 ‘쌀’을 짊어지고, 일부는 온갖 조롱과 멸시를 뒤로 한 체 “정신의 나침반은 책”이라 믿으며 책과 문서, 활자를 품은 채 낯선 땅으로 향했다.

그 갈림길에서 ‘쌀과 책’이라는 두 선택은 훗날 고려인 공동체를 일군 두 기둥이 되었다. 쌀을 택한 이들이 척박한 땅을 일구어 공동체의 밥상을 마련했다면, 책을 택한 이들은 학교와 신문사, 극장을 세워 언어와 정신의 터전을 지켰다.

고려인마을의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책을 든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려인의 정신사와 언어문화의 뿌리를 다시 되돌아보고 있다.

1902년에 태어난 조선문자의 장인 남해룡은 소련 고려인 사회의 언어 체계를 정립한 조선문자 편집의 선구자였다. 그는 한글의 점과 획 하나하나에 존재의 증거를 새기며, 한글 출판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1960년 1월 20일자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발표한 「조선문자를 어떻게 제작하였던가?」는 단순한 기술 보고서가 아닌, ‘언어를 되찾는 역사’의 증언문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조합된 활자는 유랑민 고려인의 삶 속에서도 한글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언론의 양심, 송진파는 언론인, 문인, 행정가로 활동하던 중 해방 후 1948년 북한에 초청되어 교육성과 사회과학 아카데미, 문화선전성 등에서 활동했지만,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어와 민족의 뿌리, 양심을 잃지 않았다.

결국 북한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그는 소련으로 돌아온 후 1964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레닌기치》 주필에 임명됐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타스켄트와 사마르칸트 등 고려인 집단 거주지에 기자망을 세우고, 정치·경제·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한글 종합지로 신문을 재편했다.

그가 만든 신문은 단순한 보도지가 아니라, 망명자의 조국이자 고려인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기억을 세운 부주필 김국천은 1980년대 초 《레닌기치》 부주필로 활동하며 홍범도 장군 추모비 건립 운동을 주도했다. 1982년 4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묘역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묘비 제막식 현장에는 그의 헌신이 있었다.

신문사에서 잉크를 다루던 그의 손길은 이번에는 돌 위에 조국의 이름을 새기는 일로 이어졌다. 그에게 편집은 단순한 기록의 기술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기억을 되살리는 ‘영혼의 노동’이었다.

이번 전시의 부제는 ‘쌀과 책’ 즉 “소유의 삶이냐, 존재의 삶이냐” 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답을 내렸다. 쌀과 책, 두 갈래의 선택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고려인 공동체를 지탱해 온 두 축이었다. 쌀을 짊어진 이들이 삶의 터전을 세웠다면, 책을 든 이들은 정신의 집을 세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활자를 세우고 문장을 지킨 편집자들의 손길이 있었다.

따라서 광주 고려인문화관의 이번 기획전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한 세기를 넘어 되살아난 활자의 기념비이자 고려인의 생존 연대기다. 피어린 강제 이주와 망각의 역사 속에서도 한글을 지켜낸 세 인물 '남해룡, 송진파, 김국천' 그들의 펜촉이 남긴 것은 종이가 아니라, 숨이었다.

그 숨결이 지금,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다시 한글로 피어나고 있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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