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은 한글문학 기획전을 열고 있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고려인 한글문학의 불꽃을 다시 밝히는 자리다.

그 속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름이 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고려인 사회에서 시와 소설을 한글로 써온 문인 남경자(1942년생)다. 고려극장의 무대와 고려일보의 지면을 오가며, 사라져가는 언어와 공동체의 기억을 붙잡아온 그는,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인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남경자는 시와 소설을 넘나든 보기 드문 작가다. 그의 시는 「기념비 앞에서」, 「나는 나는 부러워요」, 「숨박곡질」, 「상봉」, 「유치원아 잘 있거라」 등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상처와 그리움을 담아냈다. 또한 「지마의 비밀」, 「상봉과 이별」, 「청춘의 낭만」과 같은 소설에서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고려인의 청춘과 일상, 그리고 공동체적 연대를 기록했다.

특히 시 「기념비 앞에서」는 고려인 문학의 상징과도 같다.

“돌덩이 기념비 앞에 서니/들리지 않는 울음이 가슴을 친다/이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그림자여/우리는 너희를 잊지 않았다.”

여기서 기념비는 단순한 돌이 아니라, 강제이주와 민족 수난의 역사를 상징한다. 남경자의 시선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 기념비 앞에 서 있는 세대의 심정에 닿아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 곧 공동체 정체성의 뿌리를 잇는 행위임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아 초원에서 피어난 언어의 불꽃- 시인이자 소설가 남경자(1942)/사진=고려인마을 제공

남경자는 창작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고려일보 한글판 주필로 활동하며 공동체의 현실과 문화를 지면에 담았다. 알마티에서 발행되는 고려일보는 중앙아시아 디아스포라의 삶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체였고, 그의 글과 편집은 곧 공동체의 숨결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카자흐스탄 문화부가 그에게 장관상을 수여한 사실은, 그의 기여가 단지 고려인 사회 내부에 머문 것이 아니라, 현지 사회에서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리정희, 정장길, 최영근 등과 함께 남경자는 제3세대 고려인 한글문학 작가 군으로 꼽힌다. 이는 강제이주 1세대의 구술적 기록을 넘어, 낯선 이국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가 한글 문학으로 목소리를 낸 드문 사례다. 그의 글은 단순한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고려인의 지난 세기와 새로운 세대를 잇는 가교였다.

짧고 소박한 언어 속에, 그는 역사적 기억과 공동체적 상실, 언어와 정체성을 지키려는 몸부림을 응축했다. 그의 시와 소설은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모국어 문학의 최전선에서 기록된 증언이었다.

오늘날 남경자의 이름은 한국 문학사 본류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신문 지면 위의 기록은 중앙아시아 초원에 타오른 언어의 불꽃이었다. 사라져가는 모국어 속에서도 한 편의 시, 한 편의 소설이 공동체의 숨결을 지켜냈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 문학인 남경자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고려인마을 #고려인 #재외동포 #광주광역시 #역사마을1번지 #광주여행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