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복싱연맹 심판위원 시절의 백승영


[시사의창= 조영섭 기자] 필자는 글을 쓰지 않는 날 오전에는 올림픽 공원을 걸으며 사색한다. 걷다 보면 창의(創意)적인 아이디어(idea)와 함께 등장인물이 불쑥 떠오른다. 이번주 컬럼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국가대표 복서 출신 백승영도 이 같은 난해한 과정을 통해 당첨되었다. 백승영은 1962년 8월18일 매헌 윤봉길 추사 김정희 탄생지인 충남 예산 출신이다. 예산은 1929년 종로구 관훈동에 최초로 조선 권투 구락부를 창설한 성의경 선생 탄생지이다. 당시 조선 권투 구락부는 초창기 한국복싱의 희망이자 횃불이었다. 이런 역사를 간직한 충남예산 복싱은 복싱의 성지(聖地)답게 아마츄어 국가대표 출신인 백승영을 비롯 신동길 박군순 김재경 신은철 배경석 프로로 눈을 돌리면 동양 챔피언 김현 신춘교 문태진 윤석현 박봉관을 비롯 최응산 차상준 유화룡등 복서들이 활동하였다.

대전 한밭체육관 출신의 백승영(청운실고) 은 174cm의 훤칠한 신장에 강력한 스트레이트로 무장한 정통파 복서다. 1979년 제60회 전국체육대회에(밴텀급) 충남 대표로 출전 이대회 우승자 곽동성(전북 대표)에게 판정패 성장통을 겪는다. 1980년 청운실고 2학년 때 출전한 제4회 김명복 박사배(페더급) 에선 결승에 선착 충북 대표 박광천에 아깝게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다. 이어진 전국 선수권 대회 8강전에서 문성길과 양대 산맥을 형성한 전칠성 (목포 덕인고)을 상대로 한템포 빠른 스트레이트 연타로 득점을 올려 판정승을 거두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졸업반인 1981년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개최된 제31회 전국 학생선수권 결승(라이트급)에서 하종호(경북체고)를 반박자 빠른 카운터로 상대로 압도하며 판정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다. 하종호는 1987년 킹스컵과 세계 군인선수권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여세를 몰아 88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미들급)로 선발되면서 백승영에 당한 패배의 아픔을 달랬다.

1982년 유도대(현 용인대)에 입학한 백승영은 그해 제63회 전국체전에 출전 1회전에서 전북대표 조규남과 맞대결한다. 1961년 군산태생의 조규남은 1980년 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황정한을 꺾고 선발되어 제3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고교생 국가대표 였다 또한 그는 전북체고 재학시절 각종 대회에 출전 최우수 선수상(MVP) 2차례 포함 전국대회 5관왕을 차지한 난공불락의 복서였다. 그러나 백승영은 무쏘의 뿔처럼 과감하게 돌격하는 조규남의 예봉(銳鋒)을 한단계 높은 테크닉으로 따돌리면서 대회 최대의 이변을 일으키며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에서 노련한 이현주(목포대)와 맞대결한 백승영은 판정패를 당한다. 83년 제64회 전국체전 4강에서 백승영은 정교한 테크닉을 보유한 국제대회 2관왕 정희조(경북대)조와 맞대결 판정승을 거두고 한고비를 넘긴다.

86년 12월 전국선수권 우승자 백승영


정희조는 현역시절 MBC 신인왕 최우수복서 권철(상원체) 을 비롯 성두호 신창석 송광식등 톱복서를 잡은 복서로 86 아시안 게임 최종 결승에서 전진철에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3ㅡ2 판정에 출전권을 상실한 불운의 복서였다. 백승영의 결승전 상대는 1961년 3월 전남 무안 출신의 83년 제6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최우수복서(MVP) 진행범 (전남)이었다. 이대결은 마치 칼과 방패의 싸움처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러나 막판 폭주 기관차 진행범의 질주에 밀려 근소한 차로 판정패 은메달에 머문다. 진행범은 84년 LA 올림픽 최종선발전(라이트급)에서 전칠성을 잡고 올라온 김기택을 꺾은 올림픽 최종선발전 최종우승자였다.

백승영은 85년 김명복배 대회서도 결승에서 청소년 대표 출신의 사우스포 (故)도종태 (동아대)에 5ㅡ0 판정승 우승을 차지했다. 백승영이 대학 4년 동안 이토록 화려한 명성을 쌓은 뒤안길에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밴텀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송순천 용인대학 교수의 존재감도 큰 역할을 했다. 1986년 2월 대학 졸업과 함께 상무에 입대한 백승영은 1986년 3월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라이트급) 결승에서 숙적 전칠성과 재대결한다. 당시 전칠성은 83년 로마 월드컵 은메달 84년 LA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 관록이 붙은 상태였다.

1승 1패를 기록한전칠성(좌측)과 백승영


이대결에서 백승영은 일진일퇴의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하지만 판정은 상대적으로 지명도(指名度)가 높은 전칠성에게 돌아가 백승영은 상대 전적 1승1패를 기록한다. 그해 개최된 제67회 전국체전 LW급 4강에서 국제대회 3관왕 고희룡(제주도)을 잡고 결승에 진출 최대의 이변을 창출한 장용강 (울산 정인)을 백승영은 판정으로 따돌리면서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한다. 86년 12월 한해를 마무리하는 전국선수권 대회에서도 전년도 전국체전 금메달 오봉균(동국대)을 5ㅡ0 판정으로 잡고 피날레를 장식한다. 이번 컬럼을 쓰면서 당시 한국 아마복싱의 선수층이 상당히 두터웠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1987년 4월 한미 국가대항전에서 미국의 마르티네에 1ㅡ2로 패한 백승영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한 그해 9월 88년 서울 올림픽 (LW급) 1차 선발전 결승에서 김시영을 판정으로 꺾고 상대 전적 2연승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LW급) 선발전에서 김재경(동국대) 김민기(한국체대)을 잡고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관록의 김시영은 2차례 국제대회(서울컵 킹스컵) 은메달 포함 64회 인천 전국체전에 금메달을 획득한 복서였다. 1988년 3월 백승영은 서울컵 대회에 출전 4강에서 무릎부상으로 동메달에 그친다. 그러나 그 경기가 백승영의 복싱 기록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만다. 올림픽 최종선발전( 김시영 김기택 전진철 백승영)을 앞두고 훈련하던 어느날 서울컵에서 발생한 고질적인 무릎부상이 재발(再發) 현역 생활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다.

용산 경찰서 백승영 경감


이 여파로 핀란드 국제대회와 세계군인 선수권 대회는 물론 가시권(可視圈)에 들어온 88서울 올림픽 출전권마져 상실 복싱계를 떠난다. 복싱계 소리 없는 강자 백승영은 결국 9년 동안 현역 생활하면서 114전 98승 (32KO.RSC) 16패의 전적을 호랑이 가죽처럼 남기고 링을 떠난다. 작은 성공은 노력으로 이룰수 있지만 큰 성공은 대운(大運)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성취하기 어렵다는 격언을 실감하는 장면이다. 88년 8월 상무를 전역한 백승영은 긴 장고 끝에 용산경찰서교통계에 근무하면서 인생 2막을 시작한다. 그는 복싱에서 익힌 공명정대한 사명감으로 무장, 시간이 흐르면서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한다. 결국 경찰의날에 경찰청장 표창장 경우 처장 표창장 등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백승영은 경감으로 진급한다.

백승영 경감부부


경찰로 근무하는 와중에 아내가 백승영 경감 박봉의 봉급을 알뜰살뜰 모아 사당동에 30평대 APT를 마련하였다. 똑똑한 남자는 자신보다 휠씬 똑똑한 아내를 선택 해야한다. 왜냐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2022년 환갑에 맞춰 백승영은 정년 퇴임한다. 그리고 준비된 일정액의 연금과 함께 인생 3막에 시동을 걸었다. 현역 복서 시절 숱한 강적들과 용쟁호투(龍爭虎鬪)를 펼치면서도 멘탈을 잃지 않고 수많은 승전보를 울리던 전직 복서 출신 백승영 경감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조영섭 기자 6464k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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