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부리마을에서 50년을 살았다는 77세 조창서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터에 다시 살아갈 집을 짓기 위해 포크레인으로 땅을 다지고 있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9월 2일 오후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내부마을. 와룡산 자락 아래 자리 잡은 21가구 43명의 터전은 외형적으로는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는 듯 보이면서도 이곳 주민들은 여전히 충격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7월 19일부터 시작된 시간당 100㎜에 육박하는 폭우가 산을 뒤흔들었고, 20일 결국 흙더미가 파도처럼 쏟아져 내려 마을을 덮쳤다. 그 결과 주민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산청은 지난 봄철 대규모 산불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이번 집중호우로 산사태, 급류휩쓸림, 매몰 등으로 산청서만 주민 10명이 사망하는 등 지난 집중호우는 산청군에 다시 한번 큰 상처를 남겼다. 본지 취재진은 그 후 40여일이 지난 현재 상황을 들여다보고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조명해 보도록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에 주민들 '망연자실'
“산이 무너지는 소리에 땅이 울렸다”
취재진이 부리·내부마을에 들어섰을 때, 산사태 발생 40일이 지난 지금도 마을 앞 도로 곳곳을 정비하려는 화물차와 포크레인이 분주히 작업 중이었다. 지난 산사태 발생 당시 바위와 토사로 막혀 더 이상 길이 아니었던 마을 앞 도로는 지난 상흔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산 위에서 쏟아져내려 마을로 진입할 수도, 마을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올 수도 없었던, 차량 접근이 불가능해 완전히 고립된 당시의 도로 상황은 상당 부분 정비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흔적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 남아 지난 산사태의 충격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지난 19일 발생한 산사태로 인한 도로와 마을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던 부리, 내부마을의 피해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 19일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부서진 내부마을의 어느 집 한 채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지난 19일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부서진 내부마을의 어느 집 한 채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주택과 축사, 창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엔 흙탕물과 뻘만이 남았다. 남아 있는 집조차도 벽까지 진흙에 잠겨 형체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었다. 집 안의 가전제품, 장롱, 이불은 진흙에 파묻혀 더 이상 물건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집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주택 한편에는 창고로 쓰였던 곳으로 보이는 작은 공간 한 곳만이 폐허 한가운데서 자리를 지키는 듯 보였으며, 마을 주민들이 주워 모아놓았는지, 집주인의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서너 개의 액자는 슬픔을 더했다.
지난 산사태로 인해 폐허가 된 한 주택 한편에 무너진 집에 살던 주민의 것으로 보이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더욱 처참하다. 이날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산사태가 발생한 장소에서, 포크레인 한 대가 언덕배기 위에서 작업을 하는 장면을 사진촬영하던 중 주변에 서있던 중년의 한 남성을 발견했다. 산청이 고향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50년을 살았다는 77세의 조창서씨는 지난 폭우에 따른 산사태로 인해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포크레인으로 땅을 다지고 있던 장소는 조 씨의 집과 다른 집 한 채가 더 있었는데, 두 집 모두 산사태에 산산이 무너지고 물길에 휩쓸려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전날부터 비가 많이 오나 싶더니 다음날 오전에 산사태가 발생해 순식간에 전쟁터가 됐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이어 "이러다 죽겠다 싶어 허둥지둥 집을 빠져나와 함안으로 대피했죠.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맨발로 뛰쳐나왔는데, 옷도 진흙탕에 빠진 사람처럼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니까요. 그래서 함양에서 옷도 사 입고 그랬죠"라며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조 씨는 얘기 도중 크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19일 오후 경남 산청군 산청읍 77세 조창서씨의 농장 인근이 집중호우로 인해 유출된 토사로 뒤덮였다./경남소방본부 제공.
사진 속 장소에는 부리마을 주민 조창서씨의 주택 포함 두 채의 집이 있었으나 지난 산사태로 인해 수백여마리의 가축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재산피해는 상당했다. 50년을 살아온 집이 흔적조차 사라진 것은 물론, 키우던 가축들도 모조리 죽었다. 조씨의 말에 따르면, 키우던 염소 68마리, 칠면조 120마리, 닭 150마리, 토끼 30마리가 모두 죽었다고 한다. 군청에서 지원 방안에 대한 얘기는 나오고 있지만, 전액들은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며, 아직 정확히 결정된 것은 없다면서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특히 이번 수혜로 잘 곳을 잃어버린 조씨를 포함한 마을 주민들은 현재 관내 여관이나 모텔에서 투숙 중이다. 산청군에서 두 달 동안의 숙박비를 지원해주고 있지만, 두 달 안에 이사를 가거나 다른 거처로 옮겨야 한다는 군 관계자의 말에 조씨는 두 달을 채우면 여관에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7울 19일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컨테이너 한 채가 산자락 아래서 도로까지 약 50m가량 떠내려와 있는 모습.
현재 포크레인으로 옛 집터의 땅을 다시 다지고 있는 이유는 "거의 평생을 살아온 곳인데, 다른 곳으로 갈 데도 없다"면서 다시 그 자리에 집을 지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조씨는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손으로 저 멀리 한 컨테이너를 가리키며 "저 컨테이너가 산사태가 나기 전 우리 집 옆에 있던 건데, 저 무거운 게 물살에 둥둥 떠 저기까지 떠내려간 거야"라며 "산사태로 인한 물살이 대체 어느 정도길래 저 무거운 컨테이너를 저기까지 옮겨놨나"라고 말했다.
"산청 지역 일대 이미 산사태우려 큰 상황이었다"
기자는 다시 조금씩 아랫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조씨의 집터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우측에 큰 산사태가 발생한 또 다른 장소가 나온다. 때마침 산사태발생지 바로 맞은편에서 한 중년의 여성이 허리를 구부린 채 호미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기자가 다가가 말은 건네자 "어디서 오셨어요"라며 다소 짜증 섞인 표정으로 기자에게 물었다. 소속과 마을을 방문한 이유를 밝히자, 얘기를 시자하기도 전에 먼저 큰 한숨부터 내쉰 여성은 "살다 살다 이렇게 무서운 경험은 해본 적이 없다"며 "정말이지 생지옥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이 마을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전쟁터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그는 "뉴스에서도 당시 상황에 대해 많이들 보셨겠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그 상황을 겪은 우리들은 그 공포감을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 이쪽 주변은 말끔하게 정비가 됐지만, 그때 그 상황을 봤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라면서 "며칠 전 또 비소식이 있어 얼마나 신경이 곤두섰는지 모른다"며 "당시의 경험이 큰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집으로 향해 투벅투벅 걸어갔다.
산청군 산청읍 부리마을의 주민 A씨는 지난 산사태의 참상에 대해 전쟁터와 다름없었다는 말을 남긴 후 집으로 향했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주민 A씨는 마을 어귀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기자에게 말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긴 했지만, 설마 산이 무너져 우리 집을 덮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라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는데, 이웃 주민이 4명이나 숨졌잖아요. 내 생에 두 번이나 이런 날이 오다니... 40여 년 전 태풍으로 산사태를 겪고 사촌을 잃었다는 김모(73) 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또 다른 주민 최모 할머니는 산사태 발생 전날 밤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우우’ 땅이 울리더니 산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어. 내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니까.”
마을의 가장 큰 상처는 사람을 잃은 일이다. 70대 주민 B씨는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축사를 살피러 나갔다가 산사태에 매몰됐다. A씨는 기적적으로 구조됐지만, 아내는 다음 날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김광만(61) 이장은 “집은 멀쩡했는데, 정작 소를 살피러 간 축사에서 변을 당했다”며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또 다른 주민은 “하루에도 수십 건의 안내 문자가 쏟아졌지만, 정작 우리 마을이 위험하다는 대피 문자는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 호우는 그야말로 기록적이었다. 16일부터 닷새 동안 산청 시천면에는 793.5㎜의 비가 쏟아졌다. 지난해 연간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불과 닷새 만에 집중된 것이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많은 비가 쏟아진 셈이다.
그러나 대응은 늦었다. 산사태가 오전 9시경 발생했는데도 긴급 대피 문자는 정오가 넘어서야 발송됐다. 이미 사람이 매몰되고 실종된 뒤였다. 군 전체 대피령이 내려진 시점은 오후 1시 38분, 참사가 벌어진 지 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물을 잔뜩 머금은 경사지 토양이 비를 더 이상 흡수하지 못할 때 호우에 의한 산사태가 주로 발생한다. 다수의 지역 주민들은 "당시 며칠째 내렸던 비로 지난 7월 18일 산지가 많은 산청 지역 일대는 이미 지반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산사태 우려가 큰 상황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산사태가 발생한 지난 19일 오전까지 경남지녁에 호우가 예보돼 있던 상황에서 산청군은 지난 18일 오전 7시 시천면 등 주민 254가구·357명에 대한 일시 대피명령을 발령했을 뿐 이날 내내 추가적인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19일 발생한 산사태 발생 이후의 모습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했으나 점차 정비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하루가 지나고 결국 산사태가 발생했다. 군은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 관련 신고를 접수한 뒤인 19일 낮 12시에 공문 형태로 산청 전 지역에 주민 대피 명령을 내렸으며, 상황의 심각성을 재차 확인한 군은 이날 오후 1시 38분께 전 군민(3만3천여명)을 대상으로 긴급대피를 명령하는 재난 문자를 발송했다. 기자가 만난 한 주민이 당시 군이 보낸 재난문자 메시지라며 보여준 내용에 따르면 "관내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산간 계곡, 하천, 산사태 우려 지역 등 위험지역 접근금지. 외출을 자제하시고 이상징후 발견 시 즉시 대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군의 뒤늦은 대응에 있다. 19일 오전부터 산청군 산청읍 병정리와 부리·내리마을 등에서 산사태로 다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을 고려하면 산사태 발생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상황에서 군의 대응이 늦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군의 입장을 묻자 군의 한 관계자는 "당시 각 읍·면 이장 등과 적극 소통하면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면서 "18일 오후부터는 실질적 대피 조치가 내려지고 있었으며,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일선에선 구두로 상황이 전파됐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산사태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마을의 정상화와 피해 주민을 대상으로 한 각종 지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지난 19일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주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산사태로 인해 주변에 사용이 불가능해진 집기류들만이 남아 있다.
이원화된 ‘산사태 위기 경보’ 체계 이대로 괜찮나...
한편 21일 행정안전부의 국민안전관리 일일상황보고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 기준 전국에서 발생한 극한호우로 인한 인명피해는 총 27명(사망 18명·실종 9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역별 사망자는 경남 산청군에서만 10명이 발생해 가장 많았으며, 경기 가평군과 충남 서산시에서 각각 2명, 경기 오산시와 포천시, 충남 당진시, 광주 북구에서 각각 1명이 숨졌다. 실종자는 산청군과 가평군에서 각각 4명, 광주 북구에서 1명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과 경찰 당국이 구조 및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어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번 호우로 인해 전국 15개 시도에서 9887가구, 총 1만4166명의 주민이 대피했다. 공공시설 피해는 도로 침수, 하천시설 붕괴 등 1999건, 사유시설 피해는 건축물·농경지 침수 등 2238건으로 집계됐다.
특히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한 산청군에서는 지방자치단체와 산림청의 이원화된 ‘산사태 위기 경보’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피해를 키운 것으로 드러났다. 산림청은 이미 지난 18일부터 산청 지역 읍면 단위로 산사태 위기 예보를 발령했으나, 실제 산사태 예보 발령 권한을 가진 산청군은 산사태가 발생하고도 하루가 지난 19일 낮 12시 37분이 돼서야 주의보를 경보로 격상했다. 같은 날 낮 12시 50분이 돼서야 주민들에게 산사태 재난안전 문자가 발송됐다. 이처럼 산림청과 지자체로 나뉜 위기 경보 체계가 국지적 집중호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해 인명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문제는 경기 가평군에서도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산사태로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됐으나, 마을 대피방송이나 공무원들의 현장 대피 안내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이 제때 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참사를 겪으면서 지역 행정의 대응 부실에 대한 비난이 커지고 있다.
급박한 상황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한숨보다 앞으로의 살아갈 날들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앞선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 위에는 다시 마을을 일으켜야 한다는 무거운 숙제가 얹혔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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