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고령 척수장애인의 현황과 욕구, 그리고 정책적 과제
100세 시대, 이것은 과연 축복일까요, 아니면 비극일까요. 노후 준비가 충분한 이들에게는 장수가 선물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특히 척수장애인에게 ‘고령화’는 단순히 나이가 드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무게가 배가되는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김경진 (사)한국척수장애인협회 거창군지회장
지난 8월 22일 창원문화재단 3·15아트센터에서 열린 척수장애인 종사자 역량강화 교육에서,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이찬우 정책위원장은 ‘고령 척수장애인의 현황과 욕구, 그리고 정책’이라는 주제로 중요한 강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젊은 시절 사고나 질병으로 척수장애를 입은 이들이 이제는 60대, 70대에 접어들며, 장애와 노화라는 이중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수치와 사례로 생생히 보여주었습니다.
국립재활원 조사에 따르면 전체 척수장애인의 62.2%가 이미 65세 이상 고령층에 속합니다. 절반을 훌쩍 넘는 수치입니다. 고령 척수장애인은 비고령 척수장애인에 비해 고른 식품 섭취가 부족하고, 일상 속 스트레스와 절망감을 더 크게 느낍니다. 자살 충동과 시도도 더 많으며, 주관적 건강 상태는 훨씬 나쁘고 만성질환도 다수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사회적 지원의 필요성은 높지만 실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여, 삶의 질은 낮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고령 척수장애인은 생존 자체가 벅찰 뿐 아니라 존엄한 삶을 지키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날 강연에서 제시된 욕구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절실했습니다. 활동지원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는 사회적 욕구, 욕창과 감염·만성질환 관리 같은 의료적 필요, 무장애 주택과 안정된 거주 공간을 바라는 주거 욕구, 소득 기반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경제적 욕구,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노후의 욕구까지. 이 모든 것은 특별한 혜택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이찬우 위원장은 이런 현황과 욕구를 바탕으로 몇 가지 정책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통합돌봄지원법의 철저한 준비로 본 사업 실시 △노후 준비 지원제도 마련 △활동지원제도의 연령 제한 철폐 △지역 기반의 의료·재활 서비스 확충이 그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 지금이 척수장애인의 권리를 제도화할 결정적 순간”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저는 그 현장에서 이 말씀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제 삶과 동료들의 삶을 대변하는 절규처럼 들렸습니다.
이찬우 위원장은 ‘대전 중도장애인 사회복귀지원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정책위원장과 전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장애인 복지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온 그는 언론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당사자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해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정책 제안은 책상 위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길어 올린 실제적 대안이었습니다.
고령 척수장애인의 삶은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거울입니다. 현재 전체 척수장애인의 절반 이상이 이미 고령층에 속하고 있습니다. 선제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이 없다면 이 문제는 곧 사회적 부담으로 전이될 것입니다. 따라서 중앙정부 차원에서의 종합적 정책 수립이 시급합니다. 실태조사와 정책 연구를 정례화하고, 의료·재활·주거·돌봄이 아우러진 통합 돌봄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제는 시혜적 복지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권리 보장적 차원에서 국가가 책임 있게 나서야 할 때입니다.
강연의 마지막에서 이찬우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애는 누구도 예기치 않게 맞이합니다. 그러나 노후는 다릅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준비하면 품위 있게 맞을 수 있습니다. 장애는 불가항력일 수 있지만, 노후는 사회가 함께 미리 준비해야 할 과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이 미래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생존을 넘어 존엄을, 연명을 넘어 품위 있는 삶을.” 이 말은 고령 척수장애인의 소망이자 우리 사회 전체의 책무입니다. 이 목소리가 정책과 제도 속에서 실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