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고려인마을 번화가 한켠, 작지 않은 약국 안에는 매일같이 따뜻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한 분이 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3세 박실바(1952년생) 씨다. 그는 러시아어·우즈벡어·한국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마을 주민들의 든든한 통역사로 살아가고 있다.
25일 고려인마을에 따르면, 박실바 씨가 한국어를 처음 접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구 소련 해체 후 선교의 길이 열리면서, 1994년 우즈베키스탄을 찾아 온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것 계기가 됐다.
*고려인마을 약국 통역사 박실바 씨, 주민들의 든든한 조력자다/ 사진=고려인마을 제공
그는 선교사를 돕기 위해 매일 단어장을 만들어 손때 묻도록 외우고 또 외우며 한국어를 익혔다. 이런 노력의 결과, 이제는 한국인과 다름없이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 부지런함은 결국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먼저 한국으로 들어온 아들과 며느리, 조카를 따라 조상의 땅을 밟았고, 서울에서 정착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2019년, 광주 고려인마을로 이주한 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이곳 공동체의 따뜻한 동포애에 감동해 결국 광주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그의 진정한 역할이 시작되었다.
박실바 씨의 성실함과 언어 능력을 눈여겨본 신조야 대표의 소개로, 마침 통역사을 찾고 있던 약국을 소개받아 통역원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됐다. 마을에서 러시아어·우즈벡어·한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이는 박실바 씨가 유일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언어 장벽에 막혀 어려움을 겪던 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이 하나둘 약국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진료 상담과 약 처방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음속 답답함까지 들어주며 어느새 마을의 의지처가 되었다. 주말이면 멀리 경상도와 충청도에서까지 이주민들이 광주를 찾아오니, 그의 자리는 단순한 통역이 아닌 삶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다.
약국 통역사로서의 역할을 넘어, 박실바 씨는 이제 마을 안팎의 크고 작은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언론사 취재나 연구자들의 조사 현장에서는 언제나 통역을 맡으며, 고려인마을의 목소리를 바깥세상에 전하는 살아 있는 다리가 됐다.
그의 삶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봉사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통역원’이라 부르기보다, 마을의 지도자라 부른다.
“처음엔 단어 하나 외우기도 힘들었어요. 하지만 사람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니, 언어는 결국 저를 이 자리로 이끌어 주었죠.” 박실바 씨의 이 고백은, 단순한 통역이 아닌 사람을 연결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고려인마을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이주민들의 꿈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믿음기자 sctm03@naver.com
[창미디어그룹 시사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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