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앞둔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 독립운동가 남상락 자수 태극기가 걸려있다.
[시사의창=정용일 기자] 전쟁의 폐허 위에서 시작된 한국 경제는 80년 만에 전 세계가 인정하는 기적의 역사를 써왔다. 1955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65달러에 불과했고, 산업 기반도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2024년 현재, 한국은 1인당 GNI 3만6천 달러를 넘어섰고 명목 국내총생산(GDP) 약 1조8천700억 달러로 세계 12위권에 올라섰다. ‘최빈국에서 경제 강국으로’라는 드라마틱한 변신은 세계 경제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다.
한국 경제 성장사의 출발점에는 1960년대 시작된 정부 주도의 산업화 정책이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국가 자원을 집중 투입하며 산업 구조를 단계적으로 고도화했다. 초기에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로 외화를 벌었고, 이후 1970년대 들어 철강·조선·기계·화학·비철금속·전자 등 중화학공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했다.
정부는 특정 산업과 기업을 선별해 정책금융, 세제 혜택, 수출 인센티브를 제공했고, 이는 제한된 자원 속에서 빠르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발판이 됐다. 이 시기에 성장한 포항제철(현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전자는 현재까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력 기업으로 남아 있다.
또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은 한국을 폐쇄적인 내수 시장에서 세계 무대로 끌어올렸다. 섬유와 신발로 시작한 수출은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으로 확대됐고, 무역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일본의 ‘경제 추격자’에 불과했던 한국은, 1인당 GNI 기준으로 이미 일본을 추월했다.
사진은 64년 12월 5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 모습. <사진 제공 한국무역협회>
민주화와 제도 개선의 힘
한국의 경제 성공을 설명할 때, 오랫동안 정부 주도의 산업화가 중심 서사로 자리해왔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제도적 투명성이 장기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포용적 경제 제도’가 국가 번영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포용적 제도는 시민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 재산권 보호, 법치주의 확립을 통해 혁신과 투자를 촉진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정치적 안정과 투명한 시장경제 제도를 확립했고, 이는 장기 성장의 발판이 됐다. 로빈슨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 발전은 산업 육성과 수출 확대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성과였지만, 오늘날의 번영은 민주화가 가능하게 한 창의성과 다양성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그는 K팝, K드라마 등 문화 산업의 세계적 성공을 민주주의 이후 창의성 확산의 대표 사례로 꼽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경제는 과거의 영광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한국의 잠재성장률을 1.9%로 전망했다. OECD 추정치가 2% 아래로 떨어진 것은 2001년 이후 처음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2030년대에는 1%대 초반, 2040년대에는 0%대에 진입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잠재성장률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은 저출산과 고령화다. 생산가능인구가 줄고 노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복지 지출과 의료비 등 사회적 비용이 경제 전반에 부담을 준다. 여기에 주력 제조업이 중국과 신흥국의 추격에 직면했고, 인공지능·바이오·신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는 아직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급격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 높은 민간부채 비율(GDP 대비 207.4%) 등 여러 지표가 일본 버블경제 붕괴 직전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부산항 신선대부두에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는 모습./자료사진
‘체질 개선’ 없이는 미래 없다
전문가들은 과거와 같은 특정 산업·기업 중심의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경제 구조 전반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규제 완화, 신산업 진입 장벽 해소, 민간 경쟁 촉진이 핵심 해법으로 제시된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령화로 인한 구조적 변화는 피할 수 없지만, 기업이 신산업에 적극 투자하고 생산성을 높이면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며 “정부는 법과 제도를 개선해 민간의 혁신 의지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는 지난 80년 동안 기적과 같은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다음 80년이 기적의 연장이 될지, 아니면 성장 정체의 시작이 될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변화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한강의 기적’은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과감한 개혁과 혁신이 이어진다면, 한국은 또 한 번 세계 경제사에 새로운 기록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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