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의 뒤편으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걷는다. 이 길은 서울둘레길과 연결이 되어 있어 조경의 혜택을 받아 길과 나무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정해지지 않은 희미한 길로 접어들 때가 많다.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숲의 지역이 있는데 나는 가끔 그곳의 중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한다. 소나무 숲에서 잠든 적이 있는가. 나는 소나무 숲에서 잠든 적이 있다. 군에 입대하기 전 이야기이다. 입대 통지서를 받고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는 당연히 군에 입대하는 일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그 마음 달래어 정리하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강원도에 들어서면서 서울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경치를 감상하며 착잡함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그해 여름은 강원도 깊숙한 동네를 무더위는 걸음을 많이 힘들게 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고개를 떨구고 걸었는데 소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나무> 이두섭


[시사의창 2025년 8월호=이두섭 작가] 인제를 지나 원통으로, 그리고 당시의 포장되지 않은 국도를 따라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양양으로 접어들었다. 작은 도시에서 내리고 길을 걷다가 다시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기도 하였다. 버스 여행은 의외로 피로가 많이 누적된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이 ‘남애’라는 지역이었다. 속초와 강릉의 중간쯤에 있는 어촌 마을이다. 한낮의 햇볕이 뜨거워 몸이 힘들 무렵,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산이 있는 조용한 해변 마을에 우뚝 솟은 작은 산 위에 올랐다. 소나무 가득 자라고 있는 산. 중턱의 벤취에 앉았다. 여행 가방보다 무거운 건 내 머릿속이었다. 쌓여만 가는 미완성 캔버스들, 비평에 묻힌 말들,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게 만드는 침묵들. 나는 잠시, 그 모든 것한테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림이 아닌 ‘나’를 다시 찾고 싶었다.

작은 동네이면서 청청한 바다색이 살아있어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색은 실로 자연의 색을 그림으로는 다다를 수 없다는 절망감, 그것으로 인해 더욱 열심히 그림의 본질을 찾아가야겠다는 희망, 두 가지가 함께 입대를 앞둔 젊은 화가에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 그래, 어차피 닥칠 일이라면 피하지 말자. 바다가 보이고 소나무 숲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서 일렁이는 파도 소리와 솔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잤다.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는 소음이 아니다. 오랫동안 인간의 주변에 있어 줘 이미 세포 속에 들어와 몸과 일체화된 소리이므로 소음이 아니라 위로의 소리인 것이다. 꿈의 결과 함께했던 소나무 바람 소리. 아직도 생생하게 내 곁에 머무는 추억이다.

붓을 들지 않은 시간이어도 자연을 바라보고 있는 머릿속에 소나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까지도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바닷가의 모든 소리는 장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음악으로 내 귀를 달래주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소나무는 몸과 마음 깊숙한 곳에 아무런 자극 없이 거기 있어 주었다. 아련하게 추억하나 기억하며 시간을 보내는 소나무 숲에서의 산책이다. 식물과 나무들과 이야기를 많이 할수록 나에게 깊어지는 시간인 듯 싶다.
얼마 전, 인사동에 들러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경하다가 눈에 띄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 역시 소나무였는데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느낌이 들게 하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는 방법의 하나가 논리를 일단 배제하고 보는 것이다. 가슴을 헤집고 들어 온 그림들은 화면의 이면에 있는 내용의 질과 양도 아름답고 논리적일 때가 많다. 일단 그림으로 감정이 설득될 때 내용도 훌륭해진다고 할까. 내용, 즉 스토리와 논리가 부족한 그림은 날이 지날수록 허망해 보일 때가 있다.

<소나무> 이두섭


평생을 소나무와 함께한 노화가의 마음은 참으로 깊고 복잡할 것 같다. 붓을 들고 화면 앞에 앉을 때마다, 그에게 소나무는 단순한 그림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벗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수십 년간 그려온 수많은 소나무가 머릿속에서 겹치면서, 각각의 소나무가 담고 있던 그때의 감정과 계절, 그리고 자기 삶의 순간들이 함께 떠오르지 않을까. 어떤 날은 젊은 시절 처음 소나무를 그리며 느꼈던 설렘과 어색함을 회상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인생의 시련 속에서 소나무의 굳건함에서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수도 있겠다. 아마도 이제는 소나무의 가지, 잎이 자신의 손끝에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려지겠지만, 동시에 그 익숙함 속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소나무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간절함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소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자신의 남은 시간 동안 과연 소나무의 진정한 모습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조급함도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평생을 바친 이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자기의 삶과 예술혼을 후세에 온전히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화가의 모습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나를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하루다. 노화가의 작품에 존경의 눈길을 주고 돌아섰다.

<소나무 길> 이두섭


오늘 인사동 나갔다가 화실에서 작업 시간을 보낸 후,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오랜만에 탄천 길을 산책하였다 물가를 따라 흐르는 공기가 습기를 머금어 제법 끈적하다. 이 길을 걷는 시간은 언제나 낮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이다. 오늘도 예외 없이 밤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으로 길을 걷는다. 요즘 계속된 비로 탄천 물이 제법 불어났다. 물고기들도 자기의 궤적을 그리며 저녁 무렵의 유영을 즐긴다. 제법 넓은 개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걷는다. 걷는 돌다리의 중간쯤에서 멈춰서서 개울에 비추어진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노을의 본질이 지구의 먼지로 비롯된다 해도 아름다운 빛은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하늘은 낮 동안의 푸름을 붉은빛으로 배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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