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정용일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14개국에 고율 상호관세 부과 방침을 예고하며 무역전쟁 재점화에 나섰다. 8월 1일까지 무역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최고 40%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이번 조치는, 사실상 무역을 외교의 무기로 활용하는 강경 일변도의 접근이자, 자국 내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리한 압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조치의 가장 큰 문제는 타깃의 선정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EU, 중국 등 보복 가능성이 크거나 협상력이 강한 국가들은 사실상 제외한 채,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 라오스,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 대응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미국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만을 골라 고율 관세를 통보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미 무역수지 적자 상위국이지만, 이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상당수 품목에서 관세가 철폐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 국가에 별다른 설명 없이 25%의 고정 관세를 다시 들이밀며 일방적인 통상 압박에 나섰다.
관세율 자체도 논란의 소지가 크다. 한국은 기존대로 25%, 일본은 1%포인트 상향된 25%의 관세가 예고됐으며, 라오스·미얀마는 40%, 방글라데시·세르비아·캄보디아 등도 30~40%대 고율관세 대상이 됐다. 반면 EU는 아예 관세 서한을 받지 않았고, 협상이 급진전 중이라는 이유로 면제 대상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무역정책이 실익보다는 정치적 계산과 보복 가능성 여부에 따라 휘둘리고 있다는 방증으로, 미국의 통상정책 신뢰를 크게 훼손하는 행보라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단순한 숫자 싸움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이번 관세 협상에서 디지털 통상 규제 완화, 농산물 시장 개방 등 민감한 주제들을 함께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한국에는 쌀시장 개방 확대, 미국산 쌀 저율관세할당(TRQ) 물량 증가 등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할 수 있는 내용들이 요구안으로 올라와 있다. 현재 한국은 미국산 쌀 13만 톤에만 5%의 저율관세를 적용하고 있으며, 그 이상은 513%의 고율 관세가 매겨지는 구조다. 이러한 시장 보호 장치가 무력화될 경우 국내 농업 기반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디지털 분야에서도 미국은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한국의 망 이용료 정책, 고정밀 지도 해외 반출 제한 등을 무역 장벽으로 규정하며 이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미국 빅테크 기업의 시장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포석이지만, 국내 데이터 주권과 산업 정책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처사다. 실제로 한국은 자국의 인터넷 인프라 비용과 안보 이슈에 기반한 디지털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무역 협상의 카드로 전환하는 것은 주권 침해 소지가 크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의 관세 정책이 일시적인 협상 전술이 아닌 장기적 구조로 고착화될 가능성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동차(25%), 철강·알루미늄(50%)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에 대해 별도의 고율 품목관세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품목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무역확장법 232조 등을 통해 고율관세가 적용돼 왔으며, 지금은 사실상 대미 수출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제조업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외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러한 일방적인 관세정책은 한국과 일본 등 미국의 오랜 동맹국들에게 심각한 불신을 안기고 있다. 협상에서 성실히 임하더라도, 언제든 정권의 입맛에 따라 고율 관세가 예고되고, 통상 협상이 무역적자 숫자만으로 단정되는 현실은 예측 가능한 경제 환경을 근본적으로 해친다. 동맹과 파트너십은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구축되는 것이지, 무역적자라는 단일 잣대를 기준으로 줄 세워질 문제가 아니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는 무역을 정치 수단화하고, 경제를 일방적 협상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극단적 표현이다. 고율관세를 빌미로 동맹국에게 구조조정 수준의 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이 같은 전략은 장기적으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도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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