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정용일 기자]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관세 전쟁이 다시 고조되면서, 세계 무역 질서가 급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 가도를 달리며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고, 중국 또한 자국 산업 보호에 나서면서 양국 간 갈등은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경제·외교적 전면 충돌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국제 환경 속에서 대한민국은 중대한 외교·경제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수출 주도형 경제 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국가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1위와 2위의 무역 상대국으로, 어느 한쪽과의 관계 악화는 곧 국내 산업 전반에 직접적인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지난 몇 년간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균형 외교' 전략을 펼쳐왔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중립을 넘어 보다 정교하고 능동적인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우선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명확한 원칙과 우선순위를 설정해야 한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양국과의 협력에서 한국의 이익을 구체화하고, 전략산업·핵심기술 분야에 있어서는 국가 주도의 보호정책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등 핵심 산업에서 자립성과 공급망 다변화는 곧 경제안보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를 위해 미국主 공급망 구상인 '칩4'와 같은 다자협의체에 전략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 채널은 계속 유지해야 한다.
무역 구조의 전면적인 재정비도 시급하다.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고, 아세안, 인도, 중남미, 유럽 등 제3시장으로의 수출 다변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다. 동시에 자유무역협정(FTA)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활용도를 극대화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다수의 FTA를 체결한 국가이지만, 이를 실제 기업 활동에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 전략은 부족한 상황이다.
무역 분쟁 속에서 기회를 포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으로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한국 기업은 새로운 수출 시장을 선점하거나 우회 수출 경로로 주목받을 수 있다. 특히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할 경우, 한국산 제품은 그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단기적 이익에 머무르지 않도록 장기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가격 경쟁력이 아닌 기술 경쟁력과 신뢰성, 지속가능성으로 무장한 제품만이 무역 불확실성 속에서 생존할 수 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국제 통상 질서 회복을 위한 다자주의 복원을 선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WTO 개혁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국제 무역의 공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중견국으로서 한국은 미·중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등의 완충자, 협상의 중재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 통상, 탄소중립 무역 등 신통상 이슈에서는 선제적인 규범 설정을 통해 ‘규칙 만드는 나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관세 전쟁은 단지 수출입 품목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외교·안보·산업 전략 전반을 시험하는 장이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경제 구조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되, 분명한 전략적 목표와 원칙을 가지고 외교와 산업정책을 함께 추진해 나가는 일관된 대응이 요구된다. 거대한 무역 격랑 속에서 실리와 원칙, 자율성과 협력을 균형 있게 조율하는 노력이야말로 대한민국이 글로벌 경제 질서 재편기 속에서 생존하고 도약할 유일한 길이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각국을 상대로 발표한 상호관세 유예기간 만료를 앞두고 일부 아시아 국가들의 5월 대미 수출이 '깜짝' 증가를 기록했다. 트럼프 관세의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미국 뉴저지의 한 항만에 하역되는 대만 수출품./연합뉴스
블룸버그 통신은 베트남, 대만, 태국의 5월 대미 수출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24일 보도했다. 이는 아시아 국가들이 연말 소비 시즌을 겨냥해 하반기에 대미 수출을 많이 하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다음 달 초에 미국이 상호관세를 부과하기 전에 수입업체들이 서둘러 재고를 확보하려는 움직임 등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베트남과 태국의 5월 대미 수출은 작년 동기 대비 각각 35% 증가했으며, 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이 같은 증가세는 이번 주 미국에서 나올 경제지표에도 반영될 전망이며, 이는 미국과 각국 간의 관세 협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망했다.
올해 들어 미국의 무역 적자는 크게 늘었다. 유럽에서의 의약품 수입이 많이 늘어난 것도 원인이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
5월 미국의 무역 적자는 910억 달러로 추정되며, 올해 들어 현재까지 누적으로 6천43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팬데믹 기간의 이전 최고 기록을 훌쩍 넘어설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관세 유예기간이 종료되는 다음 달 초 아시아 국가들에 역대 최고 수준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이런 수출 증가세는 빠르게 뒤집힐 수 있으며, 이는 관련국들의 경제 성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앞서 지난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21개 회원국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이 무역 긴장으로 인해 2.6%에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3월 전망치 3.3%보다 대폭 낮아진 것이다.
중국은 이미 대미 수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중순 제네바 합의로 관세 '휴전'이 이뤄졌지만, 아직 미국의 대중국 관세는 높은 수준이다. 중국의 일부 수출업체는 제3국을 경유해 미국에 수출하는 이른바 원산지 세탁(origin washing) 방식도 사용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블룸버그는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미국과의 협상에서 고율 관세를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출 감소에 따른 성장 둔화를 겪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용일 기자 city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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