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 뒤척이며 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제의 활동으로 소모된 에너지를 다시 재정비해 오늘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잠은 어떻게 잤느냐에 따라 상쾌함과 불쾌함으로 나누어진다. 나의 경우 아침 기상은 오늘도 이상 없이 눈을 떴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우선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모여 인생이라는 덩어리가 된다면 하루를 보내는 지점에서의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은 무엇들의 앞에 서게 될까.

<수국마을> 이두섭


[시사의창 2025년 6월호=이두섭 작가] 새날이 되어 아침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밤새 안녕하시냐는 인사를 할 때 그 말의 ‘밤새 안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되어 버린 늦은 나이가 되었다. 그런 감정들이 원인이 되었는지를 모르겠지만 힘들게 겨루었던 화면 앞에서의 작업이 무의미하기도 하고 일을 포함하여 앞날에 대한 희망이라는 감정도 무디어지거나 퇴색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억지스럽게 다시 하루를 소환하여 새로운 날에 대한 가시적인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네댓 개의 일들을 화실의 구석에 있는 작은 메모 칠판 위에 적어둔다. 대부분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오늘의 할당량을 적어 둔다. 오늘은 잘 아는 사람의 인물화 1점, 집 근처 도서관에서 2시간 책읽기, 작은 오솔길 따라 산책 1시간 30분, 자동차 타이어 수리, 등을 적어두었다. 물론, 잠깐씩 그리는 그림 작업의 시간은 따로 적어두지 않았다.

요즘 내가 하는 작업은 화면에 붙어 앉아 긴 시간을 보낼수록 완성도가 높아지는 형식의 그림이 아니다. 긴 시간 익혀왔던 형태를 재현하는 형식의 이른바 손재주와는 거리를 두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라는 표현보다는 ‘작업을 한다’라는 단어가 올바른 표현일 듯싶다. 잠을 자기 전에 한번 칠하고, 자다가 잠이 깨어 바로 잠들지 못할 때 또 한 번 칠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샤워하기 전과 샤워 후 혹은 식사하기 전과 식사 후, 어디 외출하기 전에 한번 돌아와서 한번. 이런 식으로 시도 때도 없이 먼저 칠한 것이 마르면 바로바로 색을 칠했다. 행위를 우선적 목적으로 하는 작업, 그것으로 행위의 중요성을 인식해 모든 테크닉적 요소를 제거하고 느낌을 강조하여 더 넓은 감성의 스펙트럼을 추구하는 작업이 새로운 작업에 대한 꿈이 되었다. 큰 물통에 아크릴 물감을 희석하여 그 물감이 바닥이 보일 때까지 틈나는 대로 칠하길 어언 4개월이 지났으나 작업의 완성에 대한 기약은 아직 없이 진행되고 있다. 묘사에 대한 갈등과 마주할 일을 최소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몸속의 세포로 자리 잡은 과거의 기억들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림 제작에 필요한 작업의 데이터도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의 새로운 출발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과거에 내가 알고 있어서 사용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내 곁에 두어 애착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아무런 것에 애정을 갖지 않을 때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내 작업에서조차도 집착을 버려야겠다는 생각. 그것이 요즘 꿈꾸고 있는 세계이다.

<식물에 머문 3일> 이두섭


당신의 무지갯빛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내버려진, 비가 오고 바람 불고 폭풍우 몰아치는 광야에서 절대의 외로움과 소외를 느끼게 될 때, 비로소 희망의 무지갯빛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과거와의 이별이 새로운 길이라는 것. 모든 아름다운 과거와 나와의 격리만이 나머지 인생에 후회 없을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뇌는 효율적인 과정을 생각하고 편리함을 추구한다. 예측이라는 편리함으로 결정되는 결과물이 효율에 영향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편리한 효율을 내 작업에서는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걱정되는 것을 해결하지 않고 내가 꿈꾸는 것들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나다운 일일 테니.
오늘 계획하였던 도서관에서 2시간 책 읽기의 약속이 어느덧 그 시간을 훌쩍 넘겨 4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오늘 계획했던 일 중 한 가지 이상은 포기하여야 한다. 한 가지를 무엇으로 정할까 생각하며 도서관 마당 쪽의 창문을 바라보았는데 여기 올 때 푸르렀던 나무들은 어둠과 소통하며 암녹색으로 변해있었다. 책을 덮는다. 앞자리의 사람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잡으려는지 부스럭거리며 일어난다. 읽은 책은 꺼낸 곳으로 걸어가 정확한 자리에 책을 넣어 두어야 한다, 사소한 질서가 사회의 전반을 유지 시키는 것일 테니까.

밖을 나서서 길을 걷는다. 웅웅거리며 지나가는 많은 차를 바라본다. 길을 건너려 서 있는 건널목에서 자동차들의 옆면이 바라볼 수 있다. 건널목 건너편에는 신호등이 있다. 붉은빛이다. 원하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사회 질서의 시그널이다. 실은 도시의 생활이라는 것이 약속된 신호 속에서 삶이 이루어진다. 감각이라는 것이 무한한 어떤 지점에 있다면 기호와 신호는 감각과 별도로 인지라는 영역일 텐데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곤란한 상황이 있을 테니까. 어제는 큰 사거리 교차로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대각선으로 천천히 길을 가로지르는 노인을 보았다.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이 안타깝게 그 노인을 바라보았으나 견고한 사회적 약속인 신호등과의 약속이 중요한 모양이다. 누구도 달리는 차들의 사이를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허공에 떠도는 노래 소리> 이두섭


일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고와 매개 되어 자기화되는 과정의 페이지를 열어 주는 것이라 믿는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고 계획된 대로 하루를 보내며 도서관과 찻길, 그리고 이동 중에 보았던 모든 것들에 관한 생각으로 하루를 지냈다. 이런 것들을 작업의 스토리에 삽입시켜 하루를 마감한다. 화가의 길을 선택하고 난 이후로 고된 길을 가려고 작정한 것은 늘 곁에 두고 있던 나의 신념이 흐트러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들의 사명이라면 더한 길도 걸을 수 있다는 용기가 절실한 부분이 아닐까. 의미는 사람들의 심리적 저변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의미는 나의 화업에도 몹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흐르는 구름을, 바람 소리를, 눈이 내리는 소리를 그림에서 보거나 느끼거나 들을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걷는 길 석양이 아름답게 하늘에 놓여져 있다. 사람들의 얼굴도 석양빛을 받아 불그스레하다. 일상에서도 아름다움은 여기저기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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