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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의창 2025년 6월호=김동식 칼럼니스트] 멸성제(滅聖諦)와 도성제(道聖諦)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진실(眞實)이다.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掃滅)될 수 있다는 상태(狀態)를 제시하여 확신을 심어주는 가르침이다.
멸(滅)이란 열반(涅槃)을 말하는 것으로 온갖 번뇌(煩惱)의 불이 꺼진 상태로서 해탈(解脫)의 세계를 말한다. 깨달을 목표 곧 이상향(理想鄕)이 열반(涅槃)의 세계를 가르친다. 즉 애욕(愛慾)의 속박에서 벗어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解脫)을 얻음을 말한다.
멸(滅)이란 생멸(生滅)로서 있던 것이 없어진다는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멸(滅)은 고(苦)를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세계 즉 열반(涅槃)을 말하는 것이고, 멸성제(滅聖諦)란 고통(苦痛)을 없애려면 모든 욕망(慾望)을 완전히 소멸(掃滅)시킴으로써 정지(靜止)된다는 뜻으로 불교의 이상인(理想人) 열반(涅槃)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도(道)의 진리(眞理)는 도성제(道聖諦)란 인간의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야기되는데, 이것은 절제 있는 생활에 의하여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킴으로써 집착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방법이 도성제이다. 즉 도성제란 열반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고(苦)를 멸(滅)하는 길, 병고를 제거하는 것으로 도(道)는 이러한 멸을 얻기 위한 방법이며, 실천수단이기도 하다.
도성제(道聖諦)는 그런 확신을 심어주고 또 이상(理想)을 제시(提示)하고 멸(滅)에 이르는 구체적(具體的)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을 없애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고 여덟 가지 바른 실천(實薦)인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셨다.
그런데 어째서 열반(涅槃)을 멸(滅)이라 하느냐 하면 원래(元來) 열반은 범어로서는 ‘니루바아나(Nirvana)’로 불어 끈다는 뜻이다. 무엇을 끄느냐? 무엇을 멸(滅)하느냐? 하면 고(苦)를 불어 끄고, 고(苦)를 멸(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멸(滅)이라는 말에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멸(滅)함에 의해서 새로운 인생의 삶이 창조(創造)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육체를 불어 끄고, 육체를 멸(滅)하는 즉 인간의 죽음이라든가, 허무라든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왕생(往生)이나, 열반(涅槃)이나, 성불(成佛)을 죽음과 꼭 같이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인간 고(苦)의 근본이 되고 있는 무명을 멸(滅)한 것이 열반(涅槃)이다
사람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입으로는 아주 훌륭히 단념(斷念)했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쉽게 단념하지 못한다. “남에게는 지나간 일이니 무엇 생각하느냐 단념해 버리라고 하지만 정작 자기의 일일 때는 단념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쉽게 단념해지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세상 인정(認定)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그렇다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만 하는 묘한 마음이 드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이렇게 미묘(微妙)한 존재(存在)로서 사회를 구성하고 있으니 이 사회 또한 얼마나 복잡 미묘하겠는가, 인간사(人間事)를 단념하는 것도 자기(自己)요 단념(斷念) 할 수 없는것도 자기자신(自己自信)이다.
어느 철학자(哲學者)가 ‘인간은 불만(不滿)과 권태(倦怠)로움의 사이를 동요(動搖)하는 시계추(時計錘)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기가 원(願)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면 불만이 생기고 구하였다 하더라도 얼마가지 않아 권태를 느낀다.
이렇게 인간은 불만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 모양의 가지가지로 많은 모순(矛盾)을 가지고 있는 존재(存在)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탐욕(貪慾)도 영원히 그치고, 성내는 것도 영원히 그치고, 어리석음도 영원히 그치고, 가지가지의 번뇌가 영원히 그치는 것이 열반(涅槃)이라.” 하였다.
인간 고(苦)의 중요한 부분으로 되어있는 한없는 생(生)의 윤회(輪廻)에서 해탈(解脫)하려면 비효과적인 행동과 불건전한 습관을 버리거나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는 항상 살아있는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건(勁健)한 생활태도를 저마다 가지고 삶을 향유(享有)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 나옹화상(懶翁和尙) 선사(禪師)님에 시(詩)를 옮겨 놓으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차(茶)의 향기(香氣)를 음미(吟味)하면서 시구(詩句)의 깊은 맛도 같이 음미(吟味)해 보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보면서 차(茶)와 공간(空間) 속에서 진실(眞實)한 삶의 의미(意味)는 내 삶 속에서 불교(佛敎)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 속에 또한 이것도 허망(虛妄)한 욕심(慾心)일까!

‘청산은 나를 보고’
청산(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蒼空)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貪慾)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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