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의창 2025년 6월호=김향란 칼럼니스트] 정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흐름이지만, 색은 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상징 언어다. 색은 국기 위에, 당의 로고에, 시위대의 깃발과 정치인의 넥타이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메시지를 응축해 담아낸다.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정체성이고 이념이며 감정의 촉매다. 정치의 현장에서 색은 ‘선택’이 아니라 '입장'을 뜻하며, 때로는 혁명을 부르고, 때로는 억압을 의미하며, 때로는 희망을 상징한다. 이 글에서는 정치사에서 색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어떤 의미를 획득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의 유럽연합(EU) 재가입 촉구 행진 시위 ©연합뉴스[런던=AP]


빨강 : 혁명과 피, 좌파의 색
가장 강렬한 정치적 색은 단연 빨간색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혁명군의 피로 물든 깃발은 이내 붉은색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고, 19세기 마르크스주의가 부상하면서 빨강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색이 되었다. 소련의 붉은 별과 깃발, 중국 공산당의 오성홍기(五星紅旗)는 모두 빨강을 중심에 두었다. 이 붉은색은 ‘피의 희생’,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상징하면서 대중의 열망과 불만을 결집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은 이 전통을 계승하며 빨간색을 주요 색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빨강은 단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국 공화당은 민주당과의 대비를 위해 보수적 입장을 나타내며 ‘레드 스테이트(red stat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하나의 색이 이념을 초월해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담기도 한다.

파랑 : 질서와 신뢰, 보수의 색
파란색은 일반적으로 안정과 신뢰, 질서와 지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미지 덕분에 다수의 보수 정당들은 파란색을 선호해왔다. 영국 보수당(Conservative Party)과 프랑스 공화당(Les Republicains), 일본 자민당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파랑을 통해 ‘국가의 기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급진적 변화보다는 안정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정체성을 시각화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민주당이 파란색을 상징하며, 자유와 다양성, 개방을 뜻하는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미국 정치에서 파란색은 진보를, 빨간색은 보수를 상징하는데, 이 대립은 단순한 색의 차이를 넘어 국민 정체성과 이념 지형의 시각화로 기능하고 있다.

초록 : 환경, 평화, 이슬람의 정체성
초록은 비교적 최근에 정치적 색으로 부상했지만, 그 상징성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유럽의 녹색당(Green Party)은 반핵운동과 환경 보호 운동을 기반으로 197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이후 초록은 생태주의, 지속가능성, 평화를 상징하며 진보 정치의 한 축을 형성했다. 초록은 이상향에 대한 갈망을 담은 색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비전을 제시한다.
한편, 초록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종교적 상징이기도 하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랑한 색으로 알려진 초록은 이슬람 국가의 국기나 문장에서 자주 사용되며, 영적인 풍요와 부활, 신의 은총을 뜻한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국기는 초록을 주요 색으로 채택해 종교적 정체성과 정치 권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검정과 흰색 : 극단과 절제의 양면성
검정은 일반적으로 죽음, 권위, 권력을 상징한다. 파시즘과 극우 정치에서는 검정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무솔리니의 ‘블랙셔츠(Blackshirts)’는 파시스트 돌격대를 대표했고, 나치의 SS(친위대) 역시 검은 제복으로 공포와 절대 권력을 시각화했다. 검정은 정치적 강경노선과 권위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어둠의 색’이라는 문화적 상징성과 연결되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반면, 흰색은 평화, 순수, 희망의 색으로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흰색 역시 정치적 함의를 지닐 수 있다. 필리핀에서는 ‘People Power Revolution’ 당시 수많은 시민들이 흰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독재에 저항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흰색은 국민적 순결성과 연대의 상징이었다. 때로는 무채색이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정치의 무대 위, 색은 말한다
색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정치의 역사 속에서 색은 이념의 얼굴이었고, 민중의 언어였으며, 때론 공포와 희망의 깃발이었다. 오늘날에도 정치 캠페인의 색채 전략은 유권자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붉은 플래카드, 파란 배너, 초록 리본, 검은 넥타이 하나하나가 이념을 설계하고 현실을 움직인다. 색은 기억되고, 반복되며, 결국 우리의 선택을 조율한다.
정치와 색의 관계는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서 권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문화적 코드이자 역사적 증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색을 통해 권력을 읽고, 색을 통해 시대를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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